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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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층기획 - 갈 길 먼 '사법통역'] 난민 소송 4년새 16배 폭증… 통역 질은 여전히 제자리

난민·법정 통역인 전문성 절실
현 통역인 선발과정 검증 취약
유학·거주 등 경험 있으면 뽑혀
정기적 보수교육도 제대로 안해
“증인신문 대충 훑어보고 진행”
처우도 안 좋아 보완대책 절실
국내에 체류하는 외국인이 지난해 200만명을 넘어서고, 국제 정세 불안과 맞물려 피난처로 한국을 선택하는 난민이 늘면서 외국인이 당사자인 각종 소송과 그에 따른 ‘사법 통역’의 중요성이 날로 커지고 있다.

사법 통역의 수준은 외국인들의 사법 접근성과 떼려야 뗄 수 없다. 통역의 정확성과 공정성은 외국인의 법률적 권리, 나아가 인권과 직결되는 문제다.

사법 통역은 국가의 사법권 행사와 관련된 모든 절차상의 통역을 일컫는데, 근래 들어 사법 통역 수요가 빠르게 증가하는 법무부의 난민 면접 통역과 법원의 외국인 난민·형사 사건 통역에 국한해 사법 통역의 현주소와 개선 방안을 짚어 본다.

◆난민 신청 ‘홍수’…외국인 피고인도 증가세


26일 법무부에 따르면 올해 1∼10월 난민 신청자는 7291명으로, 연말이면 지난 한 해 난민 신청자 수(7541명)를 웃돌 것으로 전망된다. 국적별로는 중국이 1007명으로 가장 많고, △카자흐스탄 882명 △파키스탄 536명 △이집트 531명 △러시아 479명 등의 순이다. 난민 신청자는 2012년 1143명, 2015년 5711명 등 최근 6년간 큰 폭의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올해 들어 10월까지 난민 지위를 얻은 외국인은 미얀마인 34명을 비롯해 96명뿐이다.

난민 불인정 처분을 받으면 행정 소송을 낼 수 있다. 난민법에 따라 난민 신청자는 법무부의 심사는 물론, 난민 불인정 처분에 대한 행정 소송 등이 진행 중인 경우도 포함하는데, 행정 소송만 떼어 놓고 보면 증가세가 훨씬 뚜렷하다. 대법원에 따르면 난민 행정 소송 1심은 2012년 202건에서 지난해 3170건으로 16배 가까이 폭증했다. 같은 기간 2심과 3심도 각각 105건에서 1676건, 51건에서 779건으로 뛰었다.

범죄에 연루돼 법정에 서는 외국인 피고인도 매년 꾸준히 늘고 있다. 1심은 2012년 3247명에서 지난해 4796명으로 약 50% 증가했다. 같은 기간 2심과 3심도 각각 925명에서 1817명, 259명에서 439명으로 늘었다. 1, 2, 3심을 통틀어 매년 중국인 피고인이 3500∼5431명으로 과반을 차지했다.

◆법무부·법정 통역인 2000여명…애로 사항도


법무부와 각급 법원은 이 같은 통역 수요에 대응하기 위해 각각 ‘난민 전문 통역인’과 ‘법정 통역·번역인 후보자’를 두고 있다. 현재 법무부에는 22개 언어 220명이, 각급 법원별로는 28개 언어 1992명이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법무부 통역인 가운데 통·번역대학원 재학·졸업생과 귀화인은 각각 42명, 25명이며, 외국인도 일부 존재한다고 법무부는 설명했다.

문제는 이들의 통역 능력을 지금의 선발 과정에선 제대로 검증하기 어렵다는 데 있다. 사법 통역 전문가들은 단순히 해당 언어를 전공했다거나 해외 유학 또는 거주했다는 이유로 고도의 통역 기술과 윤리 의식 등 전문성이 필요한 법무부나 법정의 통역인이 되기도 한다고 꼬집는다.

실제로 결혼 이주 여성인 법정 통역인 A씨는 한국어 능력 시험(토픽) 5급을 취득했고, 법정 통역인으로 10년 넘게 활동 중인데, 한국어가 미숙해 전화 통화상 무슨 말인지 알아듣기 힘들 정도였다.

이에 대해 대법원은 “서면 조사, 면접 등을 통해 통역 능력을 검증할 수 있다”고 밝혔다. 법무부는 “통역인 외국어 종류가 다양해 지원자 면접 시 해당 언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면접관이 참여하기에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다”고 설명했다.

통역인들의 애로 사항도 적지 않다. 대법원은 기소·변론 요지서, 피고인·증인 신문 사항 등이 재판 기일 전에 제출되면 각급 법원이 해당 재판의 통역을 맡은 통역인에게 부본을 송부한다는 입장이지만, 법정 통역인들은 법원의 이해와 협조에 아쉬움을 토로한다.

통·번역대학원을 졸업한 중국어 전문 통역사 B씨는 “법정 통역을 하기 전 제공받는 자료는 1심은 공소장, 2심은 1심 판결문 정도고 이마저도 못 받기도 한다”며 “증인 신문의 경우에는 검찰 측 증인 신문 사항은 전날에라도 받아볼 수 있으나 피고인 측 증인 신문 사항은 재판 시작 전 변호인을 만나게 되면 요구해 훑어보는 수준”이라고 말했다.

일본어 전문 통역사인 C씨도 “법정 통역이 기본적으로 전문 영역이란 (법원의) 인식이 부족한 것 같다”고 아쉬움을 표했다.

통역의 난이도나 준비 시간 등에 비해 통역인들의 처우도 좋은 편은 아니다. 남을 위한 봉사나 재능 기부 차원에서 임하는 통역인들이 적지 않다.

C씨는 “판결문 등을 보며 사건 개요를 파악하고 재판 전날과 당일 총 3차례에 걸쳐 통역을 준비하는데, 보통 12~14시간 걸린다”고 말했다.

동남아시아 출신 귀화인인 D씨는 “(법원 등에서) 통역을 맡고 있는 언어가 소수 언어라 통역인을 구하기 어렵고, 나를 통해 누군가가 도움을 받고 있다고 느낄 때 보람이 있다”고 했다.

통역료 등이 규정된 대법원의 ‘통역·번역 및 외국인 사건 처리 예규’는 2004년 제정 이래 개정된 적이 없다. 이 대법원 예규에 따라 각급 법원은 실제 통역 시간을 기준으로 처음 30분에 대해 7만원을, 그 이후 30분마다 5만원을 지급한다. 법무부는 2015년 마련한 ‘난민 통역인 등 비용 지급 규칙’에 따라 30분마다 2만5000원을 지급한다.

대법원과 법무부 모두 각각 재판장이나 법무부 장관 등이 통역의 난이도, 통역인의 전문성 정도 등 제반 사정을 고려해 통역료를 증액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통역 질 향상 위한 교육 없어…전문성 강화해야

사법 통역의 질을 높이기 위한 통역인들의 운영·관리 측면에서도 법원과 법무부의 문제가 크게 다르지 않다. 우선 별도의 교육을 꼭 이수하지 않아도 되고, 그 내용도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한다.

법원의 경우에는 각급 법원별로 선정한 통역인 후보자들에게 1년에 한 차례 2시간 정도 소송 절차 전반이나 통·번역에 대한 교육을 실시한다. 보수 교육은 없다. 

다만 법원별로 다양한 노력이 이어지고 있다. 서울고법이 지난 17일 전문가들을 초청해 ‘외국인 사법 지원 간담회’를 열고 법정 통역 등 개선 방안을 모색한 게 대표적이다.

A씨는 “법원 교육을 매년 받고 있는데 그다지 도움은 안 된다”며 “올해도 지난해와 같은 내용에 사례도 똑같았다”고 전했다. B씨도 “법정 통역이 어떻게 진행되는지, 통역인이 갖춰야 할 자세는 뭔지 등 처음 뽑힌 통역인에게 적합한 것 같다”고 말했다.

대법원은 일종의 교육 교재인 법정 통역인 편람을 16개 언어로 펴내 일선 법원의 교육을 지원하고 있다. 하지만 법정 통역인이 존재하는 28개 언어 가운데 나머지 12개 언어는 교재가 따로 없다.

법무부는 난민 전문 통역인을 상대로 1년에 한 차례 5시간 이상 통역 기술·윤리 등에 대한 보수 교육을 실시 중인데, 이수가 의무화돼 있진 않다. 법무부 난민 전문 통역인 E씨는 “매년 교육을 받고 있고 도움이 되긴 하는데 내용이 반복된다”고 지적했다.

이 같은 이유로 전문가들은 정기적인 재교육 등을 통한 사법 통역인들의 전문성 강화가 시급하다고 입을 모은다.

사법 통역 연구 권위자인 이지은 이화여대 통역번역대학원 교수는 “통역인으로서의 전문성을 갖추지 못한 사람이 사법 통역을 맡으면 사법 정의를 왜곡할 수 있다”며 “기존 통역인에게는 전문 통역 등 보수 교육을 실시하고 국가 공인 사법 통역사 자격 제도를 도입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 교수는 또 통역 녹음 파일의 무작위 추출·평가나 재판 방청을 통한 통역 모니터링 등을 보완책으로 제시했다.

이주민지원공익센터 ‘감동’ 고지운 변호사도 “통역인들을 상대로 정기적 교육을 실시하고, 법무부나 대한변호사협회 등 유관 기관들이 교육 프로그램을 함께 개발하는 방안도 생각해볼 수 있다”고 말했다. 고 변호사는 이어 “소송 당사자인 외국인과 같은 국적의 외국인이 통역할 때, 종족 등이 달라 통역이 원활히 진행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며 “사법 통역의 특수성을 감안해 재판부가 통역인 후보자들의 출신 종족이나 종교, 정치적 성향 등의 정보를 토대로 개별 재판의 통역인을 선정할 수 있어야 한다”고 덧붙였다.

난민인권센터 김연주 변호사는 법무부 난민 면접 통역과 관련해 “난민법상 난민 신청자가 녹음이나 녹화를 요청하면 거부해선 안 된다는 규정이 있는데, 녹음·녹화를 요청할 수 있다는 안내가 제대로 이뤄지지 않아 정작 당사자들은 그런 권리가 있는지 모른다”며 “통역의 정확성을 담보하려면 난민 면접 과정을 반드시 녹음하거나 녹화할 필요가 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박진영·배민영 기자 jyp@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