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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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르도 2013년산 와인 들고가면 망신당한다 [최현태 기자의 와인홀릭]

2013년은 보르도 포도품질 최악의 해로 기록 / 폭망 빈티지도 첨단 양조로 맛나게 만들어 / 두르뜨 에썽스는 최고의 해에만 나오는 ‘와인의 정수’ / 4개 와이너리 포도밭중 최상급 구획 포도만 블렌딩


2013 빈티지 그랑크뤼 클라세 와인들
“폭망한 빈티지네”. 얼마전 와인 모임에서 들고 간 2013년산 프랑스 보르도 와인을 꺼내놓자 와인 좀 마셨다는 이가 왜 이런 와인을 들고 왔느냐는 식으로 눈치를 주며 시큰둥하게 내뱉는군요. 보르도 와인을 마시다보면 빈티지(Vintage)라는 단어가 많이 등장합니다. 보르도는 세계 와인의 심장으로 불리지만 사실 포도를 재배하기는 매우 까다로운 곳이랍니다. 약간 온화하고 습한 기후인데 날씨가 매년 고르지 않아 포도 품질이 들쭉날쭉하기때문이죠. 포도나무는 3∼4월쯤 싹이 트는데 이때 서리가 내려서 얼면 사실상 그해 농사는 망치고 맙니다. 따라서 서리가 내릴 것 같으면 밤에 연기가 많이나는 난로를 피어 담요처럼 온기로 덮어주거나 직접 버너로 포도밭의 온도를 높이기도 합니다. 

특히 꽃이 열매를 맺는 5∼6월이 매우 중요한데 보르도에는 이 시기에 비가 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러면 꽃이 제대로 수정을 못해 포도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프랑스에서 이를 ‘쿨뤼르(coulure)’라고 하죠. 또 작고 씨 없는 열매가 발생(밀르랑다주)하거나 포도의 크기와 익는 속도가 다 달려져 수확시기를 잡기 매우 어려워집니다. 특히 양조할때 덜 익은 포도가 들어가 와인의 품질에 엄청난 영향을 줍니다. 이때문에 포도가 완전히 익을때까지 기다리가 하루 차이로 수확시기를 놓쳐 비라도 쏟아지기 시작하면 그야말로 ‘폭망’입니다. 이런 날씨때문에 기후의 좋고 나쁨을 표시한 빈티지 차트까지 나올 정도랍니다. 보통 2009년, 2010년, 2015년을 최고의 빈티지로 꼽고 2011년과 2012년은 ‘망빈’으로, 2013년과 2017년은 최악의 빈티지로 기록됩니다. 특히 2017년음 봄부터 서리가 습격해 수확량이 전년보다 46%나 감소했을정도로 큰 피해를 봤습니다. 이에 보르도는 한 가지 품종에 올인하지 않고 여러 품종을 섞어서 품질을 보완합니다. 따뜻한 해는 만생종인 카베르네 소비뇽을 많이 섞고 서늘한 해는 조생종인 메를로 많이 섞는 식이죠. 

와인 상태를 점검하는 두르뜨 오너 패트릭 제스탱(Patrick Jestin·왼쪽)
하지만 요즘은 상황이 많이 달라졌습니다. 모든 최첨단 양조 기술 총동원해 빈티지가 나쁜 해에도 ‘꽤 마실만한’ 와인을 만들어 내고 있답니다. 최악인 2013년도 잘 살려냈을 정도죠. 역삼투압 방식으로 포도의 수분을 빼내 맛을 농축시키거나 포도가 아주 나쁠때는 아예 얼려서 수분을 짜내 포도를 응축시킵니다. 또 발효 끝난 뒤에도 껍질을 그대로 담가 둬 탄닌을 더 뽑아내기도 합니다. 발효를 거쳐 알코올이 높아지면 탄닌이 더 잘 추출되기때문이에요. 보르도는 와인이 완성되기전 셀러에 있는 와인 맛을 보여준 뒤 사전에 판매하는 앙프리머(En Primeur) 방식으로 유통됩니다. 이런 앙프리머 테이스팅때 와인을 맛나게 만들기 위해 미량산소주입(Micro Oxigenation)으로 빨리 숙성시켜 탄닌을 훨씬 부드럽게 만들기도 합니다.

에썽스
반대로 포도 작황이 안좋을때는 건너뛰고 빈티지가 아주 좋을때만 생산되는 보르도 와인도 있습니다. 보르도 그랑크뤼를 뛰어넘는 품질을 지녀 ‘슈퍼 보르도’라는 별명이 붙은 에썽스(Essence)입니다. 보르도 최고의 네고시앙 두르뜨(Dourthe)가 빚는 와인으로 에썽스는 ‘와인의 정수’라는 의미랍니다. 이름답게 2000년 첫 빈티지를 출시한이후 11개 빈티지만 출시됐을 정도이며 빈티지별 6000병만 한정 생산합니다.

두르뜨 소유 와이너리 현황
샤토 벨그라브
샤또 르 보스끄
샤또 라 갸르드
토 그랑 바라이 라마젤 피제악
두르뜨는 1840년 피에르 두르뜨가 네고시앙 두르뜨 프레르(Dourhe Freres)를 설립하면서 역사가 시작됐니다. 170여년동안 보르도의 명망 있는 4개의 가문들이 모여 뚜르뜨가 만들어 지고 2007년 샴페인의 명가 티에노(Thienot) 가문까지 합류하면 현재의 두르뜨가 완성됐답니다. 두르뜨는 현재 와이너리 9개를 갖고 있는데 이중 4개 샤토가 소유한 밭에서도 최고등급의 포도만 엄선해 블렌딩해서 만든 와인이 바로 에썽스입니다. 4개 와이너리는 오메독(Haut-Medoc) 그랑크뤼 5등급 샤토 벨그라브(Chateau Belgrave), 생떼스테프(Saint-Estephe) 크뤼 부르주아 샤또 르 보스끄(Chateau Le Boscq), 그랑크뤼 1등급 샤토 오브리옹이 있는 그라브 뻬삭-레오냥(Pessac-Leognan)의 샤또 라 갸르드(Chateau La Garde), 지롱드강 우안을 대표하는 생테밀리옹 그랑크뤼(Saint-Emilion Grand Cru) 샤토 그랑 바라이 라마젤 피제악(Chateau Grand Barrail Lamarzelle Figeac)입니다. 

이처럼 소유한 와이너리의 최상급 포도만 모아서 와인을 빚는데다 2015년은 최고의 빈티지로 알려진2009년과 2010년에 버금갈 정도로 포도 품질 뛰어난 해로 꼽혀 에썽스 2015년은 2014년보다 앞서 올해 시장에 선보였답니다. 2014는 내년쯤 선보일 예정입니다. 에썽스는 두르뜨 와이너리들이 소유한 포도밭 320ha중 가장 최고급 포도밭 8ha의 최상급 포도만 사용합니다. 에썽스 2015는 2017년 1월 280 배럴의 와인 중 24개의 배럴의 와인만 선택돼 블렌딩됐습니다. 블랙베리, 까시스와 같은 달콤한 검은 과일향과 향신료, 코코아, 바닐라향이 우아하게 어우러지고 탄닌은 힘이 있으면서 부드러운 질감으로 입안을 채웁니다. 

한국을 찾은 두르뜨 오너 두르뜨 패트릭 제스탱(Patrick Jestin)
한국을 찾은 두르뜨 오너이자 최고경영자 패트릭 제스탱(Patrick Jestin)과 함께 에썽스 2005, 2008, 2009, 2010, 2015 다섯해의 와인을 버티칼 테이스팅했습니다. 에썽스는 하이트진로에서 수입합니다. “두르뜨는 소유한 9개 와이너리의 포도밭 환경을 오랫동안 연구했어요. 특히 각각의 와이너리가 소유한 포도밭에서 최상급 포도가 생산되는 구획이 어딘지 연구를 집중합니다. 이런 과정에서 각각의 포도밭에서 뛰어난 와인을 만들고 있지만 그것을 뛰어넘는 와인을 만들수 있지 않을까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죠. 결국 최고의 구획인 2ha를 선정해 발효와 양조과정을 거친뒤 뀌베중에서도 최고의 뀌베만 엄선해 블렌딩한 에썽스가 탄생합니다. 그래서 울트라 보르도, 슈퍼 보르도 와인이라 할 수 있죠. 명성에 걸맞게 매해 만들지 않아요. 포도 품질이 기대에 못미치면 과감히 포기한답니다”. 

에썽스는 여러 AOC의 포도를 섞어서 만들기 때문에 규정상 생테밀리옹 등 특정 AOC 명칭은 사용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2000년 빈티지가 첫 출시됐을때 오퍼스원, 사이카이아 등 위대한 와인들과 블라인트 테이스팅을 통해 이런 유명한 와인들에 버금과는 품질을 지녔음이 입증됩니다.

에썽스는 빈티지마다 블렌딩 비율이 달라집니다. 에썽스 2005는 카베르네 소비뇽 50 %, 메를로 35%, 카베르네 프랑 8%, 쁘디 베르도 7%를 섞었습니다. 2005년에는 카베르네 프랑의 품질이 워낙 뛰어 생테밀리옹에서 생산되는 카베르네 프랑을 처음으로 넣기 시작합니다. 18년 지났지만 아직 신선한 산도와 과일향 잘 느껴질 정도여서 에썽스가 장기숙성에 능한 와인임을 보여주네요. 코에서 바다 미네랄이 훅치고 들어옵니다. 잘 익은 붉은 체리, 블랙커런트, 토스트, 코코아, 삼나무향이 조화롭네요. 카베르네 프랑은 영할때는 바이올렛 꽃향을 간직하다가 숙성되면서 스파이스함 과실향을 더해주는 역할을 합니다. 카베르네 소비뇽은 나무향에서 숲의 향으로 변해가는 특징이 있는데 이를 잘 표현합니다. 

에썽스 2008은 카베르네 소비뇽이 73%나 들어가 비율이 높고 메를로 18%, 쁘띠 베르도 9%가 블렌딩 됐습니다. 그리 좋은 빈티지는 아니어서 엉프리메때 에썽스 빈티지중 비교적 가격이 낮게 거래됐다고 합니다. 신선하면서도 우아한 여성의 느낌을 줍니다. 붉은 과일 향과 나무, 블랙페퍼가 강렬하면서도 아주 맑고 깨끗한 산도가 느껴집니다. 탄닌은 실크처럼 아주 부드럽고 향수같은 향이 이어집니다. 오래동안 잘 숙성된 와인에서 나는 가죽향과 동물향도 느껴집니다.

에썽스 2009는 카베르네 소비뇽 53%, 메를로 33%, 쁘띠 베르도 10%, 카베르네 프랑 4%가 블렌딩 됐습니다. 매우 환상적인 포도가 생산됐는데 좀 더워서 위험 부담도 있던 해였습니다. 아주 강한 볼륨감이 전해집니다. 잘 익은 블랙체리의 진한 과일향과 감초향이 좀 강하고 민트향이 느껴집니다. 전반적으로 부드러운 모습을 보여줍니다. 신대륙 와인 생산지처럼 더워서 포도가 너무 잘 익어 많이 익은 과일 느낌이 나 2008보다 매력은 좀 떨어지는 편입니다. 더구나 2008년에 비해 많이 영하며 좋은 빈티지이지만 더 좋은 모습으로 변할려면 많은 시간이 필요해 보입니다.

“사실 2008과 2009는 둘다 완벽한 빈티지여서 과거 1989와 1990중 어디가 좋은지 논쟁이 벌어졌을때와 비슷한 상황이에요. 2010 빈티지도 산도감이 좋아 아직 어떤 해가 더 좋았다고 말하기는 이르죠. 변화과정을 좀 지켜봐야 해요”.

에썽스 2010은 카베르네 소비뇽 62%, 메를로 32%, 쁘띠 베르도 6%를 섞었습니다. 블랙체리, 까시스 등 잘 익은 검은 과일향에 향신료, 감초와 약간의 박하향이 특징입니다.

에썽스 2015년는 레이블 좀 바뀌었는데 얼굴에 바르는 엑기스 같은 농축액이라는 의미를 담아서 물방을 넣었습니다. 제스탱은 2015는 앞으로 발전하면 2009랑 비슷한 스타일이 될 것으로 예상합니다. 2009와 비슷하지만 더 우아해졌으면 하는 바램이 있어서 알코올 너무 많이 추출하지 않았다는 설명이네요. 

최현태 기자 htchoi@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