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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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생필품 판매 늘었지만 ‘사재기’ 없어… 해외선 '사재기 열풍'

WHO ‘팬데믹 선언’ 이후 국내 표정 / 대형마트 매장마다 생활 필수 상품 가득 / 고객도 많지 않아… 라면·간편식 등 인기 / “판매 증가세는 외식 자제, 집밥 는 탓 / 과거 사스 등서 터득한 학습 효과 덕분” / 소비자들 외출 꺼려 온라인 매출은 급증 / 생수 132· 채소류 141· 건강식품 98% ↑ / 업계 “재고 충분”… 공급부족 우려 일축
국내는 ‘풍성’ 세계보건기구(WHO)가 코로나19 확산 상황을 ‘팬데믹’(세계적 대유행)으로 선언한 12일 서울 한 대형마트에서 시민들이 생필품을 고르고 있다. 남정탁 기자

12일 오후 2시쯤 롯데마트 서울역점 식품매장.

WHO(세계보건기구)가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에 대해 ‘팬데믹(대유행)’을 선언한 이날 롯데마트는 해외에서 생필품 사재기가 벌어지는 것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다. 매장엔 생필품이 가득하고, 고객은 많지 않았다. 간간히 일부 고객이 묶음 포장된 라면과 가정간편식(HMR) 등 생필품을 카트에 담을 뿐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주부 김미숙(34)씨는 “늘 늦게 들어오는 남편이 요즘은 집에서 저녁을 먹는다. 그래서 주말까지 가족들이 먹을 가정간편식과 라면 등을 샀다”며 들어 보였다. 생수와 라면 등을 카트에 가득 담은 김봉식(63)씨는 “평소에는 별생각 없다가 서울에서 확진자가 크게 늘었다는 뉴스를 보고 (이렇게) 생필품을 챙기게 됐다”고 불안해했다.

코로나19 확진자가 전국으로 확산하면서 일부 생필품 판매가 늘고 있다. 방역을 위해 마트가 임시로 문을 닫거나 특정 지역을 봉쇄하는 등의 상황이 벌어질까 우려하는 고객들 일부의 발길이 늘어난 것이다.

해외는 ‘텅텅’ 11일(현지시간) 오후 미국 수도 워싱턴의 한 슈퍼마켓 파스타 진열 선반이 텅 비어있다. 미국에서는 코로나19 확산에 대한 우려로 유통기한이 긴 가공식품과 보존식품 사재기가 극성이다. 워싱턴=AFP연합뉴스

그럼에도 해외에서처럼 ‘싹쓸이’식 사재기가 나타나지 않은 것은 재난에 대비하는 성숙된 소비문화가 자리 잡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롯데마트 홍보실 이창균 수석은 “국민들이 과거 사스(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와 신종플루,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등에서 터득한 학습효과 덕분인지 대량 사재기는 없다” 며 “최근 생필품 판매가 는 것은 외식을 자제하고 집밥을 먹는 가정이 늘고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이 같은 소비생활 문화는 수치에서 잘 드러난다. 코로나19 확산세가 본격화된 2월19∼3월10일 이마트의 주요 생필품 매출은 전년 동기대비 라면은 45.7, 즉석밥은 31.6, 생수는 16가 증가했다. 롯데마트도 같은 기간 라면은 45.4, 즉석밥은 43.2, 생수는 9.4 판매가 늘었다.

라면과 생수 제조사인 농심의 신장률도 대형마트와 비슷하다. 농심 관계자는 “2월19∼3월10일 사이 라면과 백산수의 공장 출고량과 생산량이 전년 동기대비 30가량 증가했다”며 “이는 유통사들의 발주량이 늘어났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WHO가 팬데믹을 선언한 가운데 12일 오후 서울 한 대형마트에서 시민들이 생필품을 고르고 있다. 남정탁 기자

온라인에서는 생필품이 날개 돋친 듯 팔리고 있다.SSG닷컴이 2월19∼3월10일 매출을 분석한 결과 식품 카테고리 전체 매출은 전년 동기간 대비 108.5 증가했다. 이어 생수 132.8, 채소류 141.2, 홍삼·비타민 등 건강식품 98.5 등의 매출 신장세를 기록했다. 또 간편식품인 밀키트 1347.2, 통조림 220.8, 라면 153.3, 즉석밥 124.7, 쌀 106 등 전 품목에서 크게 늘었다.

이 같이 오프라인 업태보다 온라인쇼핑 매출이 급증한 것은 코로나19의 감염 전파력이 강해 소비자들이 외출을 꺼리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배경 때문에 겉으로 드러난 사재기가 없고, 오히려 소비자들이 온라인쇼핑 창구를 통해 차분히 코로나19 사태에 대응하고 있다는 평가도 나온다. 최택원 SSG닷컴 영업본부장은 “코로나19 감염증 확산 우려로 소비자들이 온라인몰 비대면 쇼핑을 선호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며 “배송을 위한 생필품 확보에 총력을 다하고 있다”고 말했다.

일부 생팔품 품귀 현상에 대해 유통업계 직원들은 “생필품 수요가 급증한 건 맞지만 제조사들이나 유통업체에서 이를 감당 못할 정도는 아니다”면서 “아직은 재고가 충분히 확보돼 있다”고 공급 부족 우려를 일축했다.

11일(현지시간) 미국 수도 워싱턴DC의 한 슈퍼마켓에 파스타 판매 선반이 코로나19 확산 공포로 인한 사재기로 인해 텅 비어있다. 워싱턴=AFP연합뉴스

◆BBC “매장에 물건은 없고 선반만 남아”

 

“소셜미디어에 물건은 없고 텅 빈 선반만 남은 사진으로 가득하다.”

 

BBC방송은 11일(현지시간) 영국을 비롯해 전 세계에서 코로나19 확산으로 인한 사재기(panic buying) 열풍이 불고 있다며 이같이 전했다. 각국 정부는 사재기가 필요 없다고 강조했지만 이미 코로나19에 대한 극심한 공포에 잠식당한 시민들은 마스크와 손소독제 뿐 아니라 휴지·청소용품 등 생필품부터 설탕, 밀가루, 파스타, 계란 등 식료품까지 대량 구매하는 것을 멈추지 않고 있다.

 

가장 먼저 사재기 열풍이 시작된 곳은 중국과 가까운 홍콩이었다고 블룸버그통신은 설명했다. 홍콩 시민들은 중국 후베이성 우한에서 첫 번째 코로나19 환자가 나온 지 한 달도 채 되지 않은 지난 1월부터 사재기를 시작했다. 코로나19 확산을 우려해 재택근무 등 조처가 시작되자 만일에 대비해 최소 일주일치 식량과 생필품 등을 비축하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여기에 중국의 공장이 멈출 것이라는 ‘가짜뉴스’가 퍼져나갔고, 대부분 중국에서 공산품을 수입하는 홍콩에서 품귀 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호주에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에 대한 불안감으로 일부 생필품의 사재기가 벌어진 가운데 5일 멜버른에 있는 한 슈퍼마켓의 화장지 판매 코너가 텅 비어 있다. AFP연합뉴스

마치 바이러스처럼 사재기를 조장하는 소문도 순식간에 퍼졌다. 홍콩에서 시작된 생필품 사재기 현상은 싱가포르, 호주, 일본, 영국, 인도네시아, 이란 등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호주에서는 사재기 과정에서 드잡이를 벌이는 모습이 사회관계망서비스(SNS)를 통해 퍼지며 생필품 부족에 대한 공포를 부추겼다. 일본에서는 코로나19로 인해 마스크가 부족해지면서 중국에서 휴지를 만드는 재료를 가져가 쓰고 있다는 가짜뉴스에 열도가 들썩였다. 일본 전역에서 휴지 사재기로 인해 마트에서 더이상 휴지를 보기 힘들 정도였다. 당국은 일본에서 휴지는 98%이상 국내에서 생산하고 있다고 발표했지만 소용없었다.

영국에서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에 대한 불안감으로 일부 생필품의 사재기가 벌어진 가운데 지난 8일(현지시간) 런던에 있는 한 대형마트의 화장지 판매 선반이 텅 비어 있다. 연합뉴스

영국에서도 생필품 사재기가 심각한 수준에 이르자 최대 유통업체 테스코는 특정품목에 대해 1인당 5개 등 판매를 제한하는 조치를 내놨다.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는 “우리는 아주 대단한 공급망을 가지고 있다”면서 “우리 모두 책임감 있는 행동을 하고 다른 사람을 생각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했지만 분위기를 전환하지는 못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사재기를 중단하라며 대통령이 대국민 담화를 발표했고, 이란은 사재기 행위를 경제범죄로 규정하며 최대 교수형에 처할 수 있다고 엄포를 놨다.

코로나19 위기 확산이 본격화 한 미국에서도 최근 생필품을 대량 구매하는 사람들이 급속도로 늘고 있다고 외신은 전했다. 로스앤젤레스에 위치한 대형마트 코스트코의 한 직원은 “코로나19 첫 사망자가 나왔다는 소식 이후 평소와 달리 위생용품과 식료품을 사기 위해 찾아온 손님이 급증했다”고 말했다. 대체로 생수와 화장지, 쌀, 땅콩버터 등을 집중적으로 구매한 것으로 알려졌다. 대형약국 체인인 CVS도 위생 관련 용품의 재고가 바닥났다고 말했다. 블룸버그통신은 “미국처럼 서로 간의 신뢰도가 낮고, 정부에 대한 믿음도 적은 경우 사재기 현상은 더 심각해질 가능성이 높다”고 지적했다.

 

전문가들은 이런 사재기가 인간의 자연스로운 행동 가운데 하나라고 말한다. 폴 마스덴 런던예술대 소비심리학 교수는 CNBC와의 인터뷰에서 “(사재기는) 우리가 통제를 벗어났을 때 통제권을 되찾으려는 행위의 발현”이라면서 “소비를 통해 공포를 극복하는 일종의 ‘치료 과정’”이라고 말했다. 디미트리오스 트리브리코스 칼리지런던 소비자기업심리학 교수는 “불확실성이 너무 크기 때문에 사람들이 공황에 빠지고 비논리적·비이성적으로 행동하는 것”이라며 “우리는 코로나19 바이러스에 대해 아직도 대부분 알지 못한다”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당국의 확실한 지침이나 정보가 부족할 때 시민들은 혼란에 빠지고, 누군가 대규모 사재기를 시작하면 무슨 행동을 하는지 제대로 인지하지도 못한채 따라가게 된다”고 설명했다.

 

김기환 유통전문기자, 조성민 기자 kkh@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