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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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아하는 작품 구매… 재미에 돈까지 버는 ‘덕질의 경제학’ [심층기획]

‘펀테크’ 21세기 투자 신풍속도/ 단돈 1만원으로 신곡이나 미술품 등/ 작품의 지분 일부 가질 수 있는 매력/ 음원저작권 플랫폼의 87%가 ‘2030’/ IT기기 익숙한 Z세대 문화독창성과/ ‘N포 세대’ 고단한 삶이 결합된 문화/ 계층사다리 끊어진 현 시대 대안모델
#1. 취업준비생 제성구(26)씨는 지난해 우연히 음원에 투자해 수익을 내는 온라인 플랫폼을 알았다. 자신이 좋아하는 가수 노래의 일정 지분을 가진다는 점이 마음에 든 그는 모모랜드의 ‘뿜뿜’이라는 곡에 90만원을 투자했다. 이후 다른 노래를 추가로 선정해서 총 270만원을 넣었는데, 넉 달 뒤 투자금을 모두 처분하면서 408만원을 받았다. 4개월 만에 51.1%의 수익률을 냈다. 제씨는 “최근엔 좋은 곡이 올라오지 않아 재테크를 안 한다”면서도 “마음에 드는 곡이 생긴다면 언제든 투자하겠다”고 말했다.

#2. 직장인 오모(38)씨는 10년 넘게 미술 작품에 투자 중이다. 오씨가 지분을 가진 미술 작품은 22점이다. 500만원 정도를 투자해 놓은 그는 미술품 렌털, 매각 등을 통해 10년간 꾸준히 수익을 실현하고 있다. 오씨가 그림을 살 때 가장 중요시하는 건 작가의 명성이다. 수익률보단 그림의 소장 욕구가 더 강해서다. 오씨는 “최근 미술 작품을 구매할 때 이용하는 플랫폼이 위치한 강남 사무실을 다녀왔는데 1층에 제가 투자한 작품이 걸린 걸 보고 뿌듯함을 느꼈다”고 웃었다.

유례없는 0% 기준금리 시대가 도래하면서 만족할 만한 수익을 낼 투자처를 찾는 일이 거의 불가능해졌다. ‘덕질’(자신이 좋아하는 분야에 심취해 그와 관련된 것들을 모으거나 찾아보는 행위)이 보편화하고 자기만족을 추구하는 성향이 강한 2030세대들은 단순한 재테크를 넘어 행복까지 찾는 ‘펀테크’(재미+재테크)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전문가들은 빠듯한 경제생활에 따른 고민과 2030세대의 문화적 독창성이 합쳐져 펀테크 유행이 생긴 것이라고 분석한다. 다만, 자신이 감당할 범위를 벗어난 무리한 투자는 지양해야 한다고 경고한다.

◆2030세대 “좋아하는 노래나 작품에 투자하면 만족감 느껴요”

5일 저작권 공유 플랫폼 뮤직카우에 따르면 지난해 뮤직카우 누적회원 수는 전년 대비 무려 325% 증가했다. 2018년에도 누적회원이 2017년 대비 648%라는 폭발적인 증가율을 기록했다.

뮤직카우 회원은 음원의 저작권을 주식처럼 잘게 쪼개 사고팔 수 있다. 한 음원의 가치가 100만원이라고 쳤을 때 음원에 1만원을 투자하면 1%의 지분을 갖는 식이다. 음원을 소유하면 회원 간 거래로 음원을 팔 수 있고, 음원을 소유함으로써 매달 저작권료를 받는다.

뮤직카우 회원은 20대와 30대가 87%를 차지한다. 자신이 원하는 곡을 취득함으로써 만족감을 얻고 수익도 낼 수 있다는 점이 2030세대를 끌어모은 요인이다. 수익률도 낮지 않다. 지난해 말 기준 뮤직카우 회원의 경매 구매가 대비 저작권료 수익률은 연 9.1%다.

지난해 10월 아이돌 노래를 처음 구매한 뒤 6개월째 투자하고 있는 최모(23)씨는 자신이 좋아하는 가수의 곡을 사고 돈도 번다는 점이 매력적이라고 했다. 최씨는 “힙합을 좋아해 래퍼들의 노래를 15만원어치 샀다”며 “원금을 보전하지 못하더라도 한 달에 700원 정도의 저작권료를 받아서 재밌고 괜찮은 투자라고 생각한다”고 밝혔다.

미술품 공동구매 플랫폼 아트투게더에서는 최소 1만원으로 미술 작품을 사서 분할 소유할 수 있다. 2008년 서비스 시작 이후 현재까지 누적된 모금액만 10억원이 훌쩍 넘는다. 아트투게더 관계자는 “회원 수가 점점 느는 추세인데 지난 1월에는 스페인 화가 에바 알머슨의 작품이 모집 시작 후 8분 만에 마감됐을 정도로 인기가 높아졌다”고 설명했다.

투자자는 작품을 공동구매한 사람들과 합의로 작품을 대여하거나 매각할 수 있다. 전시회, 작업장 등에 작품을 빌려주면 연 4~6% 수준의 수익률을 올린다.

1년째 미술 작품 재테크를 하는 김모(30)씨는 860만원 정도를 미술 작품 10여점에 투자 중이다. 그는 “처음에는 싼 작품을 샀지만 지금은 나중에 집에 소장하고 싶은, 마음에 드는 작품을 신중하게 고른다”며 “그림에 투자하는 게 재미있어 앞으로도 꾸준히 돈을 쓰겠다”고 밝혔다.

 

게티이미지뱅크

◆덕질과 경제행위의 결합… 투기는 지양해야

전문가들은 2030세대가 펀테크에 관심을 보이는 건 미래가 보이지 않는 경제적 상황에 관한 고민, 그들의 문화적 특수성이 합쳐진 결과라고 분석했다. 구정우 성균관대 교수(사회학)는 “주식시장에서 ‘동학개미운동’에 2030세대가 많이 몰렸다는 것과 일맥상통할 수 있다”며 “2030세대는 위험을 감수하려는 경향이 있는 데다 계층 사다리가 닫힌 상황을 어떻게든 타개하려는 모습을 보인다”고 밝혔다. 이어 “펀테크는 단순히 덕질에 만족하는 것을 넘어 좋아하는 분야에서 경제적 이윤추구를 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이동귀 연세대 교수(심리학)는 “현재 2030세대들은 평생직장의 개념이 없고 취업이 어려우며 미래가 불확실하다”며 “디지털 친화적인 세대가 복잡한 재테크 대신 재밌는 투자를 추구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물론 여유가 없는 2030세대의 상황을 반영하는 것이긴 하나 플러스를 지향하는 삶이라는 점에서 나쁘게 볼 일은 아니다”고 해석했다.

곽금주 서울대 교수(심리학)는 “조금씩 모아서 부자가 되기 쉽지 않다 보니 젊은 층에서 투기심리가 생겨나는 경우가 있는 것 같다”며 “펀테크가 투자가 아닌 투기가 되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곽 교수는 “투자를 하다 보면 점점 더 금액이 늘어날 수 있기 때문에 자신을 경계하고 조절할 수 있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이희진 기자 heejin@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