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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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권에서 학계로… "기본소득 먼저 vs 사회보장 확충부터"

반대 측 양재진 교수 “천문학적 재원 마련 어렵고 복지 사각지대 여전…포퓰리즘일 뿐”
찬성 측 유종성 교수 “사회보험 제도로는 사각지대 보완 어려워, 기본소득제 도입해야”
기본소득제 도입 문제를 놓고 상반된 입장을 갖고 있는 유종성(왼쪽) 가천대 교수와 양재진 연세대 교수. 유 교수는 기본소득 실시를 통한 재정개혁과 조세정의 실현이 가능하다는 반면, 양 교수는 기본소득과 복지국가 원리는 상충하기 때문에 사회보장망 확충이 우선이라는 주장을 펴고 있다.

정치권에서 시작된 기본소득제 논쟁이 학계로 번지고 있다.

 

이재명 경기도지사가 지난 대선 때 처음 거론한 ‘증세나 재정 건전성 훼손 없는 기본소득’이 신종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코로나19) 사태로 인한 전 국민 재난지원금 지급과 김종인 미래통합당 비상대책위원장이 재차 거론하면서 뜨거운 쟁점으로 부상하고 있다.

 

‘기본소득보다 사회보장이 우선’을 앞세워 온 양재진 연세대 행정학과 교수와 ‘전 국민 월 30만원 기본소득 가능’을 강조한 유종성 가천대 사회정책대학원 교수가 기본소득제 찬반논쟁으로 맞붙었다.

 

양 교수는 ‘기본소득과 복지국가 원리는 상충한다’는 입장인 반면, 유 교수는 ‘기본소득제 실시를 통한 재정개혁과 조세정의 실현 가능’이란 입장차를 보이는 중이다. 차기 대선의 주요 의제로 주목 받을 ‘기본소득제 논쟁’을 두 전문가의 대담을 통해 접근해 본다.

 

한반도사회경제연구회(회장 이일영)는 12일 서울 강남의 한 사무실에서 ‘기본소득 VS 전 국민 고용보험 복지국가 논쟁’이란 주제로 정례모임을 열었다. 한사연은 비판적·개방적 지역주의에 입각하여 한반도 전체에 적용할 수 있는 사회경제모델을 함께 연구하는 학자들의 모임이다. 한사연은 1997년 창립한 동아시아-한반도연구회를 토대로 하며, 2006년 시작된 국가전략 연구모임을 발전시킨 것이다. 그간 대안적인 정책모델 수립을 목표로 개방화·지역경제·북한경제 연구 등을 수행해왔다. 33년 째 계간 ‘동향과 전망’을 발행하고 있다.

 

양재진 연세대 교수

한사연 소속 양재진 교수는 ‘기본소득 분석과 비판’을, 유종성 교수는 ‘양재진 교수의 기본소득 비판에 대한 토론’을 주제로 각각 발표와 토론을 맡아 열띤 공방을 벌였다. 진행은 한사연 회장인 이일영 한신대 사회혁신경영대학원 교수가 맡았다.

 

발표에서 양 교수는 “합리적이고 이기적인 본성을 가진 인간이 자유의 원칙과 차등의 원칙, 더불어 기회의 평등을 보장하기 위해 현대복지국가를 탄생시킨 것”이라며 “사회적 위험에 빠져 소득이 급감한 자, 저소득 자, 빈곤한 자, 사회경제적 취약계층에게 수혜를 주는 것이 그 원리”라고 강조했다. 복지국가란 공동체가 세금과 보험료를 한 돼지 저금통에 모아 필요한 사람에게 필요한 크기에 맞춰 주는 시스템을 기본 원리로 돌아간다는 것이다. 반면, 기본소득의 경우 “돼지 저금통이 없다”면서 “모든 이가 그대로 나눠 갖기 때문에 보다 급여가 낮을 수밖에 없고 소득재분배 수준도 떨어지게 된다”고 꼬집었다.

 

양 교수는 전 국민 기본소득을 주장한 이 경기지사의 ‘월 1만 7000원, 연 1회 20만원’ 제안을 언급하며 “재원만 10조 4000억원이 소요되는데, 이는 2018년도 기준 25만원, 30만원 주는 기초연금 지급액 12조원에 맞먹는 금액”이라며 “생활고에 시달리는 어르신들의 어려움을 덜어줄 비용을 전 국민에게 푼돈으로 나눠 주는 꼴”이라고 비판했다.

 

양 교수는 기초생활보장제도, 실업급여, 육아휴직급여, 국민연금, 기초연금 등으로 월 최소 25만~최대 200여만 원까지 지급 가능한 데 이 복지제도의 접근성을 개선하지 않고 기본소득을 도입하면 형식적으로는 사각지대가 없어질지언정, 낮은 급여로 인해 사실상 사각지대 문제가 그대로 남는 일종의 ‘복지 사각지대’가 발생할 것을 우려하기도 했다.

 

토론을 맡은 유 교수는 양 교수의 복지국가론을 정면 반박했다. 유 교수는 “기존 사회보장제도가 욕구 혹은 사회적 위험에 대한 보편적 보장을 한다고 하지만, 욕구나 위험에 대한 판정에 자의성과 낙인효과 등의 부작용이 큰 실정”이라고 복지국가론의 맹점을 지적했다.

 

유 교수는 특히 고용보험과 공적연금 등 소득보장제도가 소득불평등을 완화하기는커녕 증폭시키고 있다고 주장했다. 즉, “대기업 정규직 등 고용안정과 높은 소득을 누리는 이들을 보다 잘 보호하고 불안정 고용과 낮은 소득으로 어려움에 처한 이들은 사각지대에 빠지거나 약한 보호만을 받고 있다”면서 저소득층 노인 1인당 공적연금 수급액이 고소득층 노인에 비해 평균적으로 1/12 내지 1/40밖에 안 되는 현실을 지적했다.

 

또, 고용보험의 실업급여와 육아휴직급여 등도 주로 고용보험에 가입된 중상층 노동자들에게 주어지고, 저임금 불안정노동자들에게 주어지는 근로장려금은 고용보험 급여에 비해 금액이 적어 이중 노동시장의 양극화를 증폭 강화한다는 것이다.

 

유 교수는 “사회적 생산의 많은 부분이 특정 개개인의 몫으로 돌릴 수 없는 토지, 환경, 과거로부터 축적되어온 지식과 정보 등 공유자산에 의한 것이기 때문에 국민소득의 일정 부분을 모두가 기본소득으로 평등하게 나누는 게 타당하다”면서 “모두가 함께 나누는 기본소득이야말로 각종 사회보험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다수의 국민을 위한 진정한 기초생활보장 시스템이며 실질적 자유를 증진하는 길”이라고 강조했다.

 

유 교수는 국내총생산(GDP)의 5~10% 수준에서 사회적 합의에 따른 점진적 기본소득제를 실시해야 증세 부담 완화와 재정 안정성을 함께 도모할 수 있다고 봤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평균 21% 수준인 사회지출이 한국은 평균 12%인 것을 감안할 때 9% 정도의 차이의 대부분을 기존 사회보장제도보다는 기본소득을 위해 사용하자는 것이다.

 

그는 GDP 10% 규모의 기본소득의 순비용은, 기존 현금복지의 일부를 대체하고 고소득층으로부터 기본소득의 일부를 세금으로 환수하면, GDP의 6~7%에 불과하다며, 기본소득을 중심축으로 하여 기존 사회보험을 개혁하면 경제적 효율성과 형평성을 동시에 제고하는 사회안전망 확보가 가능하다고 내다봤다.

 

양 교수는 유 교수의 주장에 대해 “기본소득은 사회보장제도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이들 뿐만 아니라 사각지대 밖에 대해서도 다 같이 나눠주자고 하는 것으로 실효성이 없다”면서 “모든 유권자들에게 골고루 돈을 주겠다는 것은 포퓰리즘과 딱 맞는 것으로 사실상 기본소득을 고스란히 다음세대의 부채로 남길 것”이라고 재정건전성을 우려했다. 양 교수는 또한 “이번 전 국민 재난지원금도 국방비를 삭감하고 국가가 빚을 내서 준 게 아니냐”고 꼬집었다.

 

유종성 가천대 교수

반면, 유 교수는 “복지 증세를 하려면 다수의 국민에게 복지 효능감을 주어야 하는데, 기본소득이야말로 증세에 대한 국민적 합의를 가능하게 할 수 있다”며 “기본소득의 재원 마련을 위해 재정지출구조의 개혁과 함께 소득세의 조세감면 정비, 토지보유세, 부유세 등 도입으로 보편적 증세와 부자증세를 병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기본소득 찬반 논쟁에 뛰어들게 된 이유’에 대해 반대편에 선 양 교수는 “여야 정치인들이 사각지대 해소에 실효성도 없고, 소득 보장이나 재분배 효과 그리고 소비 증대 효과도 기존 복지급여만 못한 기본소득을 들고 나온 게, 남미식 포퓰리즘과 다를 바 없어 반대론 편에 서게 됐다”고 밝혔다.

 

찬성 편의 유 교수는 “유럽의 복지선진국들에서는 기본소득에 대한 대중적 관심과 지지가 높아져도 기본소득 도입을 위해서는 기존 복지제도를 전면적으로 개혁해야 하니 쉽지 않은데, 한국은 기존 복지 지출이 아직 높은 수준이 아니어서 새로운 제도를 도입하기가 더 쉬운 측면이 있다”며 “표준고용관계와 남성생계부양자 모델에 입각한 기존 소득보장제도는 탈산업화와 불안정 노동의 증가로 이미 정합성을 상실했으므로 기본소득이라는 새로운 패러다임의 소득보장제도를 도입하는 것이 기존 복지국가의 위기를 극복하는 길”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아무리 좋은 정책도 정치적으로 실현되지 않으면 합의를 이룰 수 없는 것”이라며 기본소득 도입을 위한 정치적 논쟁은 피해나가기 어려운 것임을 강조했다. 유 교수는 “하버드대학교에서 수학 중 기본소득운동의 세계적 권위자인 벨기에 정치철학자이자 경제학자인 필리프 판 파레이스(Philippe Van Parijs)의 강의를 듣고 기본소득에 대한 관심을 가지게 되었는데, 한국에서 기본소득에 대한 논의가 진행되는 것을 보고 2~3년 전부터 기본소득에 대한 연구를 하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조정진 기자 jjj@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