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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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력 있으면 ‘성공의 사다리’ 탈 수 있다? ‘능력주의’는 속임수다

엘리트 계층 ‘인적·자본 유산’ 대물림
부모찬스 자녀들 ‘그들만의 리그’ 누려
美 하버드·예일대 재학생 절반 상위 1%
졸업후에도 금융산업 등 최고직업 독점
중산층이하 공정 사다리 점점 무너져가
교육 방식·직업 개혁… 불평등 해소해야
저자 마코비츠 교수는 책에서 “능력주의는 현대판 귀족 사회, 즉 엘리트 신분제를 양산하기 시작했다’면서 “과거의 귀족은 땅과 재산을 물려받았다면, 현대의 엘리트는 값비싼 교육을 통해 ‘인적자본’으로 대물림된다”고 지적한다. 세종서적 제공

엘리트 세습/대니얼 마코비츠/서정아/세종서적/2만2000원

 

미국 예일대 로스쿨 교수이자 예일대 사법연구소 소장으로 재임 중인 대니얼 마코비츠 교수의 역저다. 원 제목은 ‘능력주의 함정’(The Meritocracy Trap). ‘능력주의’는 영국 사회학자 마이클 영의 1958년 풍자소설 ‘능력주의’(원제: The Rise of the Meritocracy)를 통해 알려진 용어다. 능력, 다시 말하면 실력에 의한 지배를 의미한다. 책은 부제에서 보듯‘중산층 해체와 엘리트 파멸을 가속하는 능력 위주 사회의 함정’을 파헤친다. 저자는 실력대로 공정하다는 주장은 능력주의의 속임수라고 강조한다. ‘공정한 실력 평가라는 능력주의는 전혀 공정하지 않다’, ‘엘리트가 더 많이 일할수록 중산층 일자리는 사라진다’, ‘젊은 엘리트는 사교육비를 뽑아내기 위해 자신을 착취한다’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언제부터인가 ‘아빠찬스’ 내지 ‘엄마찬스’ 라는 말이 우리 사회에서도 익숙하다. 좋은 배경에다 고액의 사교육을 받은 엘리트 계층의 자녀들에게만 기회가 열려 있다. 이는 저자 마코위츠 교수가 경험했고 살고 있는 미국의 일반적 상황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한국적 상황도 마찬가지다.

책에 따르면 중산층 가정의 어린이들은 학교에서 부유층 어린이에게 뒤처지고 중산층 성인은 회사에서 속칭 명문대 졸업자에게 밀리고 있다. 엘리트 대학 졸업자들은 최고 직업을 독점하는 동시에 초고도숙련 근로자에게 유리한 신기술을 고안한다. 최고 직업은 더 훌륭해지고 나머지 직업은 더 열악해지고 있다. 엄청난 교육 투자로 얻은 근로소득 덕분에 엘리트 교육 독점은 점점 더 심화된다. 능력주의는 교육과 직업 사이에서 되먹임(출력의 일부를 입력 측으로 되돌려 입력으로 사용하는 일) 고리를 만들고, 이런 고리의 불평등은 다른 분야의 불평등을 증폭시킨다.

대니얼 마코비츠/서정아/세종서적/2만2000원

현대사회에서 능력주의는 결국 현대판 귀족 사회를 의미한다고 저자는 설명한다. 즉 엘리트 신분제가 양산되기 시작했으며, 과거의 귀족은 땅과 재산을 물려받았다면 현대의 엘리트는 값비싼 교육을 통해 ‘인적 자본’으로 대물림받는다는 것이다.

책에서 지적하는 핵심 명제는 엘리트들의 축적된 능력 그 자체가 공평하지 않다는 것이다. 즉, 중산층 출신 초·중·고교생들은 이미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시작한다. 저자는 대표적인 능력주의 사회로 미국과 한국을 지목한다. 인적 자본 투자는 부모가 살아 있는 동안 진행되며 엘리트 지위를 다음 세대에 전달한다. 다시 말해 엘리트 부모는 자녀들에게 상위 근로계층의 일원으로서 필요한 사회적, 경제적 기반을 자연스럽게 대물림한다.

엘리트 부모는 상당한 돈을 들여 키운 능력을 대물림한다. 엘리트들은 물리적 자산을 상속하기보다 인적 자본에 직접 투자하는 방식으로 유산을 물려주고 있다. 이는 중산층 이하 계층은 따라갈 수 없는 격차다. 이런 현상은 하버드대와 예일대 재학생들을 보면 뚜렷해진다. 소득분포상 상위 1%에 속하는 가구 출신이 재학생의 절반을 넘어섰다. 한국 역시 비슷한 상황을 마주하고 있다. 과거 어린이들은 아무런 근심 없이 현재에 충실했고, 성공의 사다리를 갈 수 있었지만 오늘날의 어린이들은 그렇지 않다.

직업 현장으로 시각을 돌려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한때 금융산업은 중간숙련도급 중산층 근로자들에게 유리한 분야였지만 이제는 초고도숙련도를 갖춘 상위 근로자에게 유리한 상황으로 바뀌고 있다. 수많은 중간숙련도급 직종이 사라지고 소수의 직종으로 대체되고 있다. 고급 업무에 종사하는 초숙련 엘리트 전문가가 금융산업을 지배하고, 비전문적인 지원인력은 부수적인 역할에 그치고 있다. 한마디로 금융 부문의 노동시장은 양극화되고 있다.

대니얼 마코비츠 교수

미국 노동통계국(Bureau of Labor Statistics)은 향후 10년에 걸쳐 가장 빠른 속도로 줄어들 직업 유형으로 중간숙련도급을 꼽았다. 매킨지 컨설팅의 매킨지 글로벌 연구소는 미국 노동인구 중 3분의 1이 2030년까지 자동화 때문에 설 곳을 잃을 것이라고 전망한다.

오늘날 노동소득은 소득분포의 최고 정점에 자리하고 있다. 미국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 10명 가운데 8명은 증여나 상속받은 자본의 수익이 아니다. 창업이나 경영 등의 노동을 통해 벌어들인 보수로 재산을 일구었으며 보수의 형태는 설립자나 동업자의 주식 지분이다.

모든 선진 사회는 귀족 제도(aristocracy)는 물러나고 능력주의(meritocracy)가 기본 신조가 되고 있다. 실력에 따라 누구나 기회를 얻을 수 있다는 능력주의는 명분상 지극히 타당해 보이지만 실상은 전혀 그렇지 않다. 사교육비를 들여 로스쿨이나 의전원을 졸업하고 높은 연봉의 직업을 쟁취한 엘리트들은 근면성이라는 도덕적 우월감마저 갖는 듯하다. 그들은 그들만의 성을 쌓기에 골몰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능력주의의 부작용을 해소하는 방법은 없을까. 저자는 교육과 직업 두 경로를 통한 방안을 설명한다. 부유층 자녀의 최고급 교육에 집중하는 교육방식이 개방되고 포용성을 갖도록 하고, 최고 명문학교와 대학에서라도 입시 경쟁이 완화돼야 한다는 것이다. 엘리트 근로 계층에 집중된 생산이 중산층 출신인 중간숙련도급 근로자에게 골고루 분산돼야 한다고도 강조한다. ‘부모찬스’ ‘그들만의 리그’가 회자되는 우리 사회를 돌아보게 하는 책이다.

 

박태해 선임기자 pth1228@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