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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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재우의미·중관계사] 중국차와 ‘본차이나’에 매료된 미국

1776년 미국의 독립은 미국 경제의 독립을 의미했다. 영국의 식민통치에서 벗어난 미국은 영국의 무역질서체계에서 자유로워졌다. 미국이 무역을 독립적으로 할 수 있게 되었다. 미국이 중국 무역 초기(1784-1831) 때 가장 매료된 상품은 네 가지였다. 차(茶), 비단, 자기(瓷器)와 ‘난킨(nankeen, 중국 난징에서 만들어진 옅은 황색 천의 일종)’이었다. 미국의 첫 상선 ‘중국황후’호는 차 30만근(약 18만㎏), 면직물 864필, 자기 9만6200근(57720㎏), 비단 490필, 계수나무 2100근(1260㎏) 등을 가지고 귀국했다. 1830년대부터 미국의 급속한 공업화로 중국산 방직물은 인기를 잃었다. 미국산 면제품이 중국에 역수출됐으나 판매가 저조했다.

그러나 차와 자기는 인기를 오래 누렸다. 차는 커피 보급 전에 서구의 최애 기호식품이었다. 1785년에 백만 파운드(약 45만㎏) 정도를 수입한 후 1840년에 규모가 1900만 파운드(860만㎏)에 달했다. 정부에는 최고의 세원(稅源)이었다. 따라서 부가되는 세금은 정치적 갈등과 충돌의 근원이 될 정도였다.

보스턴 ‘티 파티(1773)’사건

가령, 영국은 유럽대륙, 북미와 캐리비안 지역에서 ‘7년의 전쟁(The Seven Years’ War, 1756∼1763)’을 치르면서 막대한 재정적자를 안게 된다. 더 많은 세금 징수가 불가피했고 미국을 희생양으로 삼았다. 미국의 수입차에 10% 관세를 추가하자 미국인은 항거했다. “대표 없이 과세 없다(No taxation without representation)”면서 2년여의 불매운동 이후 보스턴 항에 342상자의 차가 바다에 버려지는 보스턴 ‘티 파티(1773)’사건으로 이어졌다. 독립전쟁의 도화선이 되어버렸다.

자기는 미국 상류층의 부를 상징했다. 조지 워싱턴 대통령의 농원저택에는 ‘중국황후’호가 수입한 302점의 자기 그릇이 즐비했다. 아이로니컬하게 중국 화가들은 그의 초상화를 위조했다. 미국 상인이 필라델피아에서 200점의 모조품을 팔았다. 원작가 길버트 스튜어트(Gibert Stuart)의 소송으로 미 법원은 1802년에 이의 판매금지령을 내렸다. 미국이 공식적으로 중국의 지식재산권 위반과 관련해 처음 내린 법적 조치였다. 중국의 ‘짝퉁’ 제품과 미국의 싸움이 유구했음을 느낄 수 있다.

주재우 경희대 교수·국제정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