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메뉴 보기 검색

1년 중 200시간만 허락된 7000년 전 한반도의 모습 [여행+]

울주 반구대 암각화와 천전리 각석
여행객들이 반구대 암각화를 감상하고 있다

울산을 가로지르는 태화강 상류에서 갈려 나온 대곡천에는 반구대 암각화와 천전리 각석이 있다. 오래전 한반도에 자리 잡은 인류의 삶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깊어 각각 국보로 지정됐다. 하지만 선명한 암각화를 즐길 수 있는 건 1년에 고작 200여 시간뿐. 오죽하면 “암각화가 지워진 게 아니라 때를 잘못 만난 것”이라는 안내문이 붙었을까. 울주 여행에서 만난 암각화 이야기다.

 

◆수천년 전 바위에 새겨진 1000여점의 그림

 

반구대 암각화는 대곡천 절벽에 너비 약 8m, 높이 약 5m의 반반한 암면에 그려진 300여 점의 그림을 말한다. 절벽 윗부분이 처마처럼 툭 튀어나왔다. 그래서 암각화는 비바람으로부터 보호받는다. 고래·거북이·물개·상어 등 바다동물, 호랑이·사슴·멧돼지 등 육지동물은 물론, 동물 사냥과 고래잡이 그림 등 선사시대 사냥과 해양 어로 모습이 고스란히 담겼다. 배, 작살, 그물 등을 이용해 고래를 사냥하는 매우 사실적인 포경 장면이 묘사돼 있다

 

천전리 암각화 암각화박물관 제공

암각화가 언제 새겨졌는지에 대해서는 견해가 다양하다. 최근까지 연구 성과로는 약 7000∼3500년 전인 신석기 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된다.

 

반구대 암각화에 있는 그림은 307점 이상으로 고래 잡는 것을 보여주는 인류 최초의 그림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고래를 잡아 해체하는 작업으로 추정할 만한 그림도 있다. 암각화 수를 ‘307점 이상’이라고 한 이유는 그림들이 한 번에 그려진 게 아닌 데다 탁본과 실측 등 여러 작업이 진행 중이기 때문이다.

 

암각화 모니터 요원인 이재권씨가 반구대 암각화 앞에서 작업하고 있다.

천전리 각석도 전체 암면이 15도 정도 기울어졌다. 너비 약 10m, 높이 약 3m의 정방형 암면에 700여 점이 새겨져있다. 암면 왼쪽에는 신석기시대 것으로 추정되는 각종 동물 그림이 있고, 상단에는 청동기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동심원, 나선형, 마름모 등이 새겨져있다. 암면 하부에는 신라시대의 말을 탄 행렬 모습과 돛을 단 배, 용 등이 날카로운 금속도구로 새겨졌다. 특히 신라 법흥왕 때 명문이 있어 고대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대략 3㎞가량 떨어진 반구대 암각화와 천전리 각석은 2010년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목록에 나란히 등재됐다.

 

국보 지정 과정은 판이하다. 1970년 발견된 천전리 각석은 1973년 국보로 지정됐다. 당시엔 시기가 특정된 신라시대 명문이 높은 평가를 받았다. 천전리 각석보다 1년 뒤에 발견된 반구대 암각화는 1995년에야 국보가 됐다. 암각화가 발견되기 6년 전 대곡천 하류에 건설된 사연댐으로 우기 때마다 물에 잠긴 탓이다. 암각화는 사연댐에서 상류로 4.6㎞ 떨어져있다. 암각화 보호를 위해 댐 수위를 낮추려다 식수난 우려가 제기돼 올해 초에야 식수 문제를 다른 곳에서 해결하는 방안이 구체화됐다. 발견 50주년인 올해, 보존의 길이 열렸다.

 

여행객들이 암각화박물관에서 설명을 듣고 있다

여행에 나서기 전에 울산암각화박물관에 먼저 들러 설명을 듣는 게 낫다. 암각화 바로 앞까지 가려면 박물관의 투어 프로그램에 참여해야 한다. 대곡천 일대에는 고려말 충신 포은 정몽주가 찾았다고 전해지는 반구대와 백악기 공룡 발자국 화석, 야생 동식물이 사는 원시 비경 등이 있다. 박물관에서 암각화까지 30분의 산책길이 즐거운 이유다.

 

김경진 울산암각화박물관장(오른쪽)과 이재권 이장이 반구대 암각화 앞에서 대화하고 있다

◆대곡천의 국보를 지키고 보호하는 관장과 이장

 

지난 2월 반구대 암각화와 천전리 각석, 일대의 계곡은 ‘반구대 계곡의 암각화’라는 이름으로 유네스코 세계유산 우선등재 목록에 올랐다. 2015년 1차 신청이 부결되고 지난해 2월 2차 신청 역시 보류됐는데, 올해 세 번째 신청이 받아들여졌다. 2010년 유네스코 세계유산 잠정목록에 오른 지 11년 만에 가장 큰 변화다.

 

갈길은 멀다. 세계유산 등재신청 후보가 되고 등재신청이 완료돼야 국내 절차가 끝난다. 이후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 신청서를 내고 자문기구의 평가, 세계유산위원회의 심의·결정을 거쳐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이 된다.

 

김경진 암각화박물관 관장은 “2025년 등재를 목표로 열심히 달리고 있다”며 “2024년까지 신청서를 유네스코 세계유산위원회에 제출해야 실사와 심의를 받아 2025년 결정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 관장은 세계문화유산으로서의 반구대 암각화의 가치를 유일무이한 선사시대 고래사냥 유적, 신석기부터 청동기를 거쳐 신라까지 긴 시간 동안 여러 사람들에 의해 이어진 그림, 암각화 자체의 예술성 등 세 가지로 꼽았다. 김 관장은 “암각화의 탁월한 가치에 대해 논의하고자 다음달 13∼14일 서울과 울산에서 전문가·연구자, 시민 등 200여명이 참석하는 국제학술대회를 개최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암각화박물관 김경진 관장이 천전리 각석을 설명하고 있다

반구대 암각화에 다다르면 “암면에 햇빛이 비치지 않으면 새끼 멧돼지, 호랑이, 표범 등의 그림 몇 점밖에 보이지 않아 다 지워졌다는 오해를 받는다”고 적힌 특이한 안내문이 있다. 10월 중순부터 2월 말까지는 24시간 내내, 나머지 날은 오후 3시 이전에 햇빛이 들어오지 않는다면서 “4월부터 9월 중순 사이에 맑은 날 오후 4시쯤 오면 7000년 전 우리 선사인들의 찬란한 솜씨를 감상할 수 있다”고 안내하고 있다.

 

이 안내판에 매일 ‘햇빛이 암면을 비추는 시각’을 적어놓는 사람은 이재권 이장이다. 2019년 2월부터 모니터요원으로 일해온 그는 “암각화를 볼수록 신령스럽다”고 했다. 해가 비추는 시간이 매번 다르고 암면에는 바람이 거의 닿지 않는다면서 암면이 절벽 안으로 들어가 있어 자연풍화가 거의 없는 절묘한 위치라고 강조했다.

 

반구대 암각화를 보러 가는 길에 만나게 되는 풍경

이 이장은 매일 암각화가 받는 일사량, 온도와 습도, 풍향과 풍속, 우천시 암면이 젖는지 여부, 동식물에 의한 훼손 여부 등 20여 가지를 조사해 보고한다. 휴일을 빼고 하루 8시간씩 일하는데, 오전에는 천전리, 오후에는 반구대에서 암각화 보존에 힘을 보탠다. 그는 “암각화 그림이 다 드러나는 시간은 1년에 최대 200시간뿐”이라며 “여행객이 그 시간에 맞춰서 오기 힘들다보니 인류 최고의 보물을 제대로 보는 사람은 5%도 안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인류유산 중에 이렇게 위대한 것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수많은 인류유산 가운데 가장 빛나는 유산이니 꼭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울주=글·사진 정재영 기자 sisleyj@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