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화는 세상에 대한 스크린샷”
윤향로(38)는 자신이 바라본 오늘의 풍경을 회화의 화면에 옮겨내는 작업에 대해 ‘스크린샷’을 빗댄다. 대중문화와 미술사, 패션 산업 등 동시대 다양한 분야에서 끌어온 요소들을 평면의 캔버스 위에 투영하는 ‘스크린샷’(2016∼) 연작을 선보이면서다. 빛이 산란하는 화면은 유년의 기억에서 건져 올린 변신소녀 만화 속에서 에너지가 움직이는 장면을 발췌한 결과물이다. 순간의 이미지를 포착하고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편집 및 변형한 뒤 회화로 옮기는 방식이다. 신비한 힘의 이동 과정은 때로 결과보다 더 환상적이고 아름답다. 스크린샷으로 남기지 않으면 금세 놓치고 마는 색채와 형상들, 목적지에 도달하기 이전까지만 품을 수 있는 황홀한 기대와 감정들.
그는 회화의 문법을 따르면서도 작업 과정에 다양한 컴퓨터 프로그램과 편집 툴을 개입시키며, 에어브러시 등 도구를 사용함으로써 디지털 스크린처럼 매끈한 질감을 선보이는 일련의 작품을 가리켜 ‘유사 회화’라고 일컫는다. 그로부터 작가가 오늘날의 회화를 바라보는 관점이 드러나는데, 미디어 기술 변화에 따라 새로운 도구와 기법을 실험하고 나아가 동시대 이미지의 생산 및 소비 방식에 대해 고찰하는 태도의 작업들을 ‘회화의 계보에 속해 있으나 이전 세대의 그것과는 조금 다른’ 무언가로서 지칭하고자 하는 태도다.
윤향로가 본격적인 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한 2010년대는 인터넷 환경 및 디지털 미디어가 순수미술의 영역에 미친 영향에 대한 관심이 본격화된 시기다. 당시 미술계에서는 ‘포스트 인터넷 아트’(마리사 올슨, 2008)라는 용어를 화두 삼아 인터넷과 함께 자라난 세대의 작가들이 선보이는 낯선 표현에 대한 논의가 지속되었다. 인터넷의 발전 이후 갱신된 이미지 생산 및 유통 방식에 따라, 온라인에서 발견된 이미지들을 복제, 전유, 재생산하는 방식을 주된 조형 언어로 활용하는 1980년대생 작가들이 주로 호명된다. 윤향로는 해당 맥락에서 대표적으로 언급되는 작가 중 하나다.
그는 2009년 홍익대학교 회화과 졸업 후 2013년 한국예술종합학교에서 조형예술과 전문사를 취득했다. 2014년 국립현대미술관 ‘젊은모색’ 참여작가 및 아르코미술관 ‘아르코 영 아티스트 프런티어’로 선정되며 주목받았다. 인도네시아 가자갤러리(2023), 실린더(2022), 학고재(2020), P21(2018), 두산갤러리 뉴욕(2017), 원앤제이 플러스원(2017), 인사미술공간(2014), 갤러리175(2012)에서 개인전을 개최했고 국립현대미술관, 서울시립미술관, 울산시립미술관, 부산현대미술관, 아르코미술관, 인천아트플랫폼, 수원시립미술관, 일민미술관, 아뜰리에 에르메스 등 유수의 기관 전시에 참가했다. 제12회 광주비엔날레(2018)와 제3회 제주비엔날레(2022)에 작품을 선보였다.
◆미지의 우주를 유영하는 빛무리들
언젠가 윤향로에게 하나의 전시를 준비하는 일에 대한 생각을 묻자 “매번 새로운 주제로 소논문을 쓰는 마음”이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는 자신의 작품세계 안팎을 탐구하는 데 진중한 노력을 기울이며 소재 및 표현의 변주를 시도해 왔다. 2020년 학고재에서 선보인 전시 ‘캔버스들’에서는 지난 세기의 추상표현주의 화가 헬렌 프랑켄탈러(1928∼2011)의 활동을 정리한 책 페이지를 발췌하여 구성요소로 활용했다. 과거와 현재가 쌓인 텍스트 자료의 ‘스크린샷’ 위에 자신의 시간을 상징하는 드로잉과 아이의 낙서를 층층이 중첩하여 완성한 화면이다.
2022년 홀1과 실린더에서 개최한 개인전 ‘태깅’에 선보인 연작은 사회관계망서비스(SNS) 게시물에 특정 단어나 상대의 계정을 태그하는 행위에서 착안했다. 하나의 단어로 함축된 태그는 직관적이어서 종종 실제 콘텐츠의 내용보다 중요하게 인식되는 역설이 일어난다. 스프레이로 여러 번 채색한 화면 곳곳에 알파벳이 어렴풋이 드러나지만 문자 자체의 의미는 더이상 중요하지 않다. 두 개의 물리적 장소 안에 놓인 작품들은 서로가 서로를 은연 중에 지시하는 한편 SNS 타임라인 위에서의 ‘태깅’으로 두 시공을 연동한다. 형상은 파편으로 쪼개어지며 더욱 추상화되는 면모이다.
디지털 스크린과 조각 연작으로 구성된 ‘Flag’(플래그·2022)는 깃발을 모티프로 한 작품이다. 바람의 속도와 세기, 방향에 따라 매 순간 다른 형태로 나부끼는 깃발이 외적 환경과 자극에 대한 반응을 즉각적으로 시각화하는 상징적 매체라고 여겼다. 2022년도 이후 자신의 삶 속 사건 및 상황들로부터 비롯된 정서를 작품에 보다 적극적으로 투영하기 시작했다. 추상 언어로 번안된 감정이란 지나치게 모진 비처럼, 거칠게 등을 떠미는 바람처럼 스스로 도울 수 없는 일들로 포화된 날들의 흘러감 속에서 어떻게든 내면의 감각들을 빛나는 무엇으로 바꾸어 보겠다는 고집스런 애틋함인지 모른다.
고된 날씨에 하릴없이 흔들리고 넘어진 뒤에라도, 모든 마음의 잔해와 무너진 파편의 가루는 예술의 일부로서 발화한다. ‘Flag’의 대형 디지털 스크린은 검은 배경에 눈부신 빛무리가 쏟아져 내리는 영상을 송출한다. 기상청 데이터를 실시간으로 전송받아 그에 대응하는 이미지와 사운드가 출력되도록 했다.
스크린은 풍속과 풍량의 변화에 시시각각 반응하는 평면의 깃발이 되어 관객 앞에 매번 다른 모양과 소리를 선보인다. 화면은 아득한 우주의 풍경을 연상시킨다. 미지의 시공은 그저 막막하기보다 또 다른 가능성을 향하여 열린 내일이다.
윤향로는 오는 8월 예술경영지원센터의 주관으로 북촌 소재 휘겸재에서 진행되는 전시에 참여할 예정이다. 9월 초 프리즈 서울과 키아프가 동시 개최되는 서울아트위크 주간에는 금천예술공장 오픈스튜디오에서 신작을 선보이는데, 오키나와를 화두 삼아 진행한 리서치에 기반하여 제작된 결과물이다. 이어 11월에는 금천예술공장 내 전시공간에서 개인전을 개최할 계획으로 구상 및 창작에 몰두하고 있다.
박미란 큐레이터, 미술이론 및 비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