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강은교 동아대 교수·시인 |
아궁이 앞에서 불 지피는 여인의 모습을 생각해보라. 치마를 한껏 벌리고 아궁이에 남아 있는 재를 훅훅 부는 모습은 얼마나 신성한가. 옛날엔 불씨를 꺼트리는 여인네는 심한 처벌을 받았다고 하지 않는가. 그 불씨가 있는 곳, 그러니까 아궁이는 ‘성소’이다. 하느님의 법궤처럼 거기엔 신성한 불씨가 있다. 그리고 거기엔 솥이 있다. 구수한 밥냄새가 있다. 뜸의 순간이 있다.
한국의 문화는 아궁이의 문화이다. 은은하게 그러나 주황빛으로 타오르는 아궁이의 불. 그것은 그러나 세상에 드러나는 법이 없다. 가장 깊은 곳, 부엌의 가장 깊은 곳에 숨어서 피어오른다.
나의 시 ‘우리가 물이 되어’에는 ‘저 불 지난 뒤에 흐르는 물로 만나자./ 푸시시 푸시시 불꺼지는 소리로 말하면서/ 올 때는 인적 그친/ 넓고 깨끗한 하늘로 오라,//’라는 구절이 있는데, 언제부터인가 많은 사람이 묻곤 한다. 거기 나오는 불의 이미지의 의미가 무엇이냐고. 질문받은 처음엔 무척 당황하였다. 왜냐하면 그 시는 애초엔 분단 통일시로 쓴 것이었으므로 거기 나오는 불의 의미는 당연히 무기라든가 그런 화기(火器)들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것을 정화, 즉 성스러운 불로 생각하였던 것이다. 아무튼 그 질문 때문에 깨닫게 되었다고나 할까, 그 불은 바로 어머니가 계시던 아궁이의 불이었음을. 그러니까 그 시의 불의 의미는 이중의 의미를 띠는 것이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그 아궁이가 사라졌다. 주거문화가 바뀌면서 재래식의 그 ‘성소’들은 천덕꾸러기가 되어 얼른 뜯어고쳐지고, 또는 아예 무시되곤 했다. 주택일지라도 거기에 아궁이는 없다. 그러나 지금 아궁이의 불씨가 사라진 가정들에는 그 무엇인가 가족들을 접착시키던 강렬한 본드와 같은 것들이 사라진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가족들은 뿔뿔이다. 아이들도 조금만 자라면 서양식으로 성인식을 하고 자기의 인생을 자기가 결정한다면서 집을 나가기가 일쑤다. 하긴 요즘은 경제적인 문제로 결혼하고서도 집을 떠나지 않는다고들 하지만.
아궁이는 가장 깊은 마음의 밀실이다. 거기엔 꿈이 있다. 꿈이 피워 올리는 하얀 연기가 있다. 타오르되, 은은히 열을 내뿜을 뿐 혓바닥을 널름대는 등 사나운 모양은 보이지 않는 우리들의 ‘불집’, 아궁이가 있었던 탓에 우리의 문화는 은은한 향기를 피워 올릴 수 있지 않았을까. 격렬한 몸짓 대신 조용하고 느리나, 따스한 우리의 문화. 그러나 아궁이가 없어지면서 사람들은 은은히 타오를 줄을 모른다. 인생을 급히, 대답을 얼른얼른 들으면서 살지 않으면 성이 차지 않는다. 아, 아궁이. 우리를 성스러운 불로써 덥히며, 마음을 다스려주며, 밥을 지어 먹이던, 그 따뜻하면서도 매운 연기의 향내여.
강은교 동아대 교수·시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