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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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타워] 링 위에 올라간 국내 대표 기업들

국익 훼손 집안싸움?… 경쟁력 제고 밑거름 될 수도

요즘 한국 재계는 전쟁판이다. SK이노베이션과 LG화학이 전기차 배터리 기술 유출 문제로 난타전을 벌이고 있고, 삼성전자와 LG전자는 8K TV 화질을 놓고 격돌했다. 4대 기업 중 세 기업이 링 위에 올라가 있는 셈이다.

17일 삼성전자와 LG전자는 각각 TV 화질을 비교하는 맞불 시연회를 열었다. 포문을 연 LG전자는 삼성 TV를 분해해 내부의 퀀텀닷(QD) 시트까지 보여주며 “QLED는 자발광 TV가 아니라 퀀텀닷 필름을 댄 LCD TV”라고 공격했고, 삼성전자는 8K 동영상을 구동시키며 영상이 제대로 나오지 않는 LG전자의 TV를 두고 “8K 콘텐츠를 구현할 준비가 덜 된 것 아닌가”라고 반격했다.

김수미 산업부 차장

같은 날 경찰은 LG화학의 형사고소로 SK이노베이션의 서울 종로구 서린동 본사와 대전 대덕기술원 등을 압수수색했다. 얄궂게도 양사 최고경영자(CEO)가 전격 회동했다가 빈손으로 헤어진 바로 다음날 벌어진 일이어서 LG화학과 SK이노베이션의 관계는 더 냉랭해졌다. LG 입장에서는 외환위기 직후인 1999년 김대중정부 주도로 이뤄진 ‘빅딜’로 사실상 뺏기다시피 한 반도체 사업이 현대전자를 거쳐 SK 품에 안겨 캐시카우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으니 ‘제2의 반도체’라 불리는 배터리만큼은 양보할 수 없다는 절박감이 클 것이다. 두 회사는 이미 미국 ITC와 델라웨어주 연방지방법원에 ‘영업비밀 침해’, ‘특허 침해’ 등으로 서로 제소한 상태고, 하루가 멀다 하고 각사 입장문을 내며 여론전을 벌이고 있다.

양측 갈등이 점입가경으로 치닫자 소송 비용이 수천억원에 달할 것이며, 국내 대표 회사들이 집안싸움을 벌이는 틈을 타 중국업체들이 반사이익을 누리는 등 결국 국익을 훼손할 것이라는 우려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청와대와 정부가 중재해야 한다는 지적에 산업통상자원부 차관이 나섰다가 발을 빼는 모습도 연출됐다.

그러나 이런 우려는 기우(杞憂)일 수 있다.

반세기 동안 앙숙으로 지내온 삼성과 LG를 보자. 삼성전자와 LG전자는 TV뿐 아니라 세탁기, 냉장고, 휴대전화 등 주력 제품을 놓고 40년 넘게 싸워왔다. 감정싸움으로 시작한 갈등은 비방전 등 국지전을 거쳐 고소, 고발이 난무하는 진흙탕 싸움으로 번졌다. 본사 압수수색과 상대측 CEO 고소, 국내외 수백억원대 소송으로 비화한 것도 한두 번이 아니다. 국내 대표 기업들의 꼴사나운 막장 싸움이라는 비판도 늘 뒤따랐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두 회사는 글로벌 TV 시장에서 쫓고 쫓기며 1,2위를 달리는 선두기업으로 성장했다. 상대방 TV를 분해하고 세탁기와 냉장고를 뜯어 관찰하고 연구해 더 나은 기술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뛰어왔다. 이제 막 태동하고 있는 8K TV 주도권 경쟁도 어느 한 기업이 낙오되기보다는 두 기업의 경쟁력을 높이는 밑거름이 될 수 있다.

삼성전자와 LG전자, SK이노베이션과 LG화학의 싸움은 집안싸움이 아니라 글로벌 기업들의 기술 패권 전쟁으로 봐야 한다. 이문에 밝은 기업들이 소송의 이해득실을 따져보지 않았을 리 없다. 미국의 대표 IT기업 애플과 퀄컴도 2년간 30조원대 세기의 소송을 벌이다가 극적으로 합의한 바 있다.

정부가 어설프게 중재에 나서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아 보인다. 대승적 차원에서 개입한다고 해도 과거처럼 ‘빅딜’을 할 수도,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하는 기업들의 이해관계를 조율할 수도 없다.

경계해야 할 것은 소비자를 우롱하고 산업 경쟁력을 깎아먹는 기업들의 담합이지, 경쟁이 아니다.

 

김수미 산업부 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