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의 심퍼시(Sympathy)라는 단어는 「동조하다」 「공감하다」라는 뜻을 지닌다. 이 말의 어원은 그리스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플라톤의 저작인 「향연편」을 원래의 말로 심포지온이라 부른다. 오늘날 교향악을 심포니라고 하고 토론회를 심포지엄이라 부르는 것도 여기에서 유래한다.
그리스시대의 사람들은 비극을 좋아했는데 플라톤의 심포지온도 인간존재의 비극적 운명에 대한 탐구이다. 결국 심퍼시라는 말은 인간의 숙명적인 불행이나 고통에 대한 「공조」라는 것이 본래의 뜻이라 할 수 있다.
사회주의운동이 전세계로 번져가면서 설움받는 「민중의 고통」에 동참하자는 심퍼시(공조)가 이심전심에만 머물지 않고 문학이나 미술은 물론 연극과 같은 예술의 장르에까지 스며들었다. 예술지상주의자들이 질색하는 사회주의적 사실주의도 그 심퍼시란 것에 기조를 깔고 있다.
에드거 스노의 「중국의 붉은 별」에 따르면 중국 공산당지도부는 대중선동의 수단으로 연극을 곧잘 이용하였다. 연극이야말로 극적인 상황의 설정과 전개로 해서 민중의 심퍼시를 불러일으키기에 안성맞춤이다. 러시아식으로 심파라고 불렀기 때문에 얼마전까지도 우리나라에서는 연극과 「신파」를 같은 것으로 알아왔다.
사회주의진영의 언론도 신파조를 벗어나지는 못한다. 연극이 우회적이라 한다면 언론은 직설적일 뿐 신파조이기는 마찬가지이다. 혁명기에는 착취당하는 민중의 고통을,그리고 체제안정기에는 연총리가 말했다는 「가장 발전된 주체의 정치제도」를 선동하는 심퍼시가 목적이다. 실제로 북한에서는 선동이란 말이 우리처럼 부정적으로 쓰이지 않는다.
신문보도의 객관성이나 공정성은 어차피 교과서에서나 논의될 일이다.
남과 북의 언론의 차이는 공정성과 객관성이 아니라 누구의 구미에 맞추느냐에 있을 뿐이다. 남쪽의 상업지는 어쩔 수 없이 아랫사람들(대중)의 입맛에 맞아야 한다. 북쪽의 신문은 선동하고 길잡이노릇을 해야 하기 때문에 아랫사람들의 궁금증에 민감할 리가 없다.
선동하는 신파조신문은 언젠가는 독자가 떨어진다는 사실을 최근 「프라우다」지의 급격한 부수하락에서 엿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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