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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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렬의 새 이야기]딱따구리

입력 : 2004-08-27 14:12:00
수정 : 2004-08-27 14:1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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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 다다다 뚜 르르륵
숲속 오케스트라의 멋쟁이 ''드러머''
딱따구리를 처음 접한 것은 어린시절 TV 만화영화를 통해서였다. 독수리나 여우, 혹은 사람들이 자기를 잡으려 할 때 꾀를 내어 오히려 사냥꾼들을 혼내주는, 참으로 당찬 딱따구리. 또 그 웃음소리는 얼마나 독특하던지….
1970년대 안방극장을 주름잡았던 ‘딱따구리’는 미국 만화가 월터 란츠가 앞서 40년에 탄생시킨 캐릭터로 미국의 붉은머리딱따구리를 모델로 삼고 있다. 이 만화영화는 80·90년대에도 재방송돼 어른부터 아이까지 그 새의 실제 모습을 보거나 알지는 못하지만 너나없이 딱따구리를 기억하게 됐다.
찬란한 무늬 옷과 짧고 붉은 치마를 입고 곧게 뻗은 부리를 치켜들고는 의기양양하게 숲속 나무 사이를 휘젓고 다니는 오색딱따구리는 텔레비전 만화영화가 시작되기 훨씬 오래전부터 우리 민족에겐 ‘숲속의 멋쟁이’로 알려진 친근한 이웃이었다.
선조들은 붉은 잠방이를 입고 얼룩무늬의 비단 띠가 있는 아름다운 새라고 시조로 읊기도 했고, 공작이나 비취새보다도 아름답고 전설 속의 봉황과도 겨룰 만한 고운 빛깔을 가진 새라고 일컫기도 했다. 옛 사람들은 해충을 잡아먹는 딱따구리같이 조정을 의롭게 구하는 충신이 많이 나와 주길 기원하며 딱따구리에 관한 시와 그림을 남기기도 했다.
‘산골마을에 사는 할아버지가 한밤중 사립문 두드리는 소리에 놀라 일어나 문 밖을 내다본다. 이리저리 찾아봐도 사람 그림자는 찾을 길이 없는데 앞쪽 나무 위에서 딱따구리 한 마리가 딱딱딱딱 나무를 쫀다. 이제야 문 두드리는 소리를 낸 것이 딱따구리인 것을 알아차린 할아버지가 ‘예끼 이놈’하며 허탈한 웃음을 짓는다.’

조선시대 서화가로 유명한 강진의 ‘협행잡절’에 보이는 딱따구리 일화다. 딱따구리의 나무 쪼는 소리를 문 두드리는 소리로 표현한 옛 선인의 문학적 표현력과 상상력이 감탄스러울 뿐이다. 딱따구리의 한자 이름은 탁목조(啄木鳥). 바로 ‘나무를 두드리는 새’라는 뜻이다.
‘뒷동산의 딱따구리 참나무 구녕도 잘 뚫는데/
우리집 저 멍텡이 이 어찌 이렇게 어두느냐/
어랑어랑 에헤야 에해야 디여러 내사랑아.’
‘앞 남산의 딱따구리는 생구멍도 뚫는데/
우리집 저 멍텅구리는 뚫어진 구멍도 못 뚫네.’
충남 보령지방에서 전래되는 어랑타령과 전남 진도에서 불려지는 진도아리랑의 한 구절들이다. 딱따구리가 번식을 위해 나무에 구멍을 뚫고 둥지를 짓는 봄, 개울가 빨래터에 동네 아낙들이 하나둘 모여들어 빨랫감을 주무르다 어랑타령이나 아리랑을 흥얼대면 빨래터엔 자지러지듯 웃음소리가 넘쳐났다. 조혼으로 아직 사내 구실을 못하는 어린 신랑과 함께 사는 아낙들의 서러움과 시집살이의 고초가 슬그머니 웃음으로 버무려지는 노래 가락들이다.

▲까막딱따구리, 청딱따구리, 큰오색딱따구리(왼쪽부터)
산과 들에 봄기운이 만연하면 숲에서는 딱따구리가 마치 북을 치듯 나무를 쪼며 내는 ‘따라라락’ ‘드르르륵’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데 이는 딱따구리가 동족의 다른 경쟁자들에게 자기의 영역을 알리는 방법인 동시에 짝을 찾는 소리이기도 하다. 이러한 번식 습성을 생태학자들은 ‘드러밍(Drumming)’이라고 한다. 국내에서 볼 수 있는 딱따구리로는 오색딱따구리, 큰오색딱따구리, 쇠딱따구리, 아물쇠딱따구리, 쇠오색딱따구리, 청딱따구리, 까막딱따구리, 크낙새 등이 있으며 이 중 까막딱따구리와 크낙새는 천연기념물 242호와 197호로 보호되는 희귀새이기도 하다.
딱따구리가 구멍을 파는 나무는 사람들의 눈에는 건강하게 보여도 곤충이 나무속을 파먹기 시작한 것들이다. 딱따구리는 이러한 나무에서 곤충을 꺼내 먹기 때문에 오히려 나무가 건강하게 자라도록 해 준다는 사실이 밝혀진 뒤부터 인공 조림을 할 때 자연림을 군데군데 남겨 놓고 새 나무를 심는 등 딱따구리를 활용하는 방법을 시험하고 있다.
딱따구리가 먹이를 잡기 위해 구멍을 판 나무는 몇 년쯤 지나면 스스로 구멍을 메우고 건강하게 살아가지만 그렇지 않은 나무는 벌레에 먹혀 선 채로 말라 죽는다. 이로 미루어 볼 때 딱따구리는 숲과 나무에 생명을 주는 고마운 의사 선생님인 셈이다.
사진부기자/leejr@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