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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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경 교수의 요재지이] <中> 협녀(俠女)

입력 : 2004-10-08 08:13:00
수정 : 2004-10-08 08:1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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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것은 아버지의 원수를 갚기 위해…”
고생이 놀라서 물었다.
“너 이게 무슨 짓이지?”
소년은 웃으면서 대답했다.
“나는 이 정숙한 아가씨를 구경하러 왔을 뿐이에요.”
그는 다시 아가씨를 돌아보며 빈정거렸다.
“오늘은 남을 탓하지 못하겠지?”
아가씨는 눈썹이 치켜올라가고 얼굴이 새빨개지더니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며 재빨리 윗도리를 벗어젖혔다. 그러자 가죽 주머니가 하나 나타났는데, 그녀가 안에서 잡아채듯 꺼낸 것은 바로 한 자 남짓한 날이 새파란 비수였다. 소년은 그것을 보자 놀라 뒷걸음질치며 달아났다. 아가씨는 문 밖까지 쫓아나가 사방을 둘러보았지만 소년은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가 비수를 공중으로 내던지자 ‘캭’ 소리가 나면서 무지개 같은 빛이 길게 뻗치더니, 잠시 후 어떤 물건이 땅에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고생이 얼른 등불을 비췄더니, 바로 머리와 몸통이 따로 떨어져 나간 한 마리의 백여우였다. 고생이 놀라 말문이 막혀 있는 동안, 아가씨가 말했다.
“이놈이 바로 당신의 연동( 童·역주1)입니다. 저는 본래 놓아줄 생각이었는데, 제놈이 굳이 죽겠다고 덤벼드는군요!”
말을 마치자 그녀는 비수를 거둬 다시 주머니 속에 찔러 넣었다. 고생이 아가씨를 끌어당기며 안으로 들어가려 했더니 그녀는,
“이 요물 때문에 흥취가 모두 사그라들었으니 내일 밤을 기다리세요.”
라고 말하고는 문을 열고 그대로 가버리고 말았다.
이튿날 저녁 아가씨가 정말로 다시 찾아와 두 사람은 흠뻑 사랑에 도취할 수 있었다. 고생이 아가씨에게 그런 능력이 어디서 생겨났느냐고 캐묻자, 그녀는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이는 당신이 알 바가 아닙니다. 반드시 비밀을 지켜야 하는 사안이므로 만약 누설이 되면 당신에게 이로울 것이 없어요.”
고생이 또 그녀에게 서로 시집 장가 드는 일을 상의하려고 했더니,
“당신과 잠자리도 같이했고 또 당신을 위해 물 긷고 밥을 지었으니, 제가 당신의 아내가 아니면 무엇이란 말입니까? 우리는 이미 부부인데 다시금 시집 장가 이야기를 할 필요가 있을까요?”
하는 대답이었다.
“당신, 우리 집이 가난한 게 싫어서 그러는 거요?”
“당신은 정말 가난하지요. 그렇다고 저는 부자입니까? 오늘 밤 당신과 동침한 것은 당신의 가난이 애달파서 그런 거예요.”
헤어질 무렵, 그녀는 고생에게 이렇게 당부했다.
“이런 구차한 행동은 자주 있어서는 안 되는 거예요. 와야 할 때는 제가 알아서 올 테지만, 올 때가 아니라면 당신이 억지를 부려도 소용없어요.”
그 후로도 서로 마주치기만 하면 고생은 매번 그녀를 잡아끌며 사사로운 이야기를 나누려고 했지만, 아가씨는 번번이 달아나며 자리를 피했다. 하지만 그를 위해 바느질을 하고 식사를 준비해 주는 것은 다른 집 부인네들과 전혀 다를 바가 없었다.
몇 달이 지난 뒤, 아가씨의 어머니가 죽었다. 고생은 있는 힘을 다해 장례를 치러주었고, 아가씨는 이때부터 혼자 살게 되었다. 고생은 그녀가 집안에 혼자 있기 때문에 마음대로 할 수 있겠다 싶어 담장을 넘어 집안으로 들어갔다. 창문을 사이에 두고 여러 번 사람을 불렀지만 끝내 아무 응답도 들려오지 않아 대문간을 쳐다보았더니, 원래부터 안쪽에는 빗장도 걸려 있지 않았다. 고생은 속으로 아가씨가 딴 남자를 만나는가 하는 의심이 들었다. 밤이 되어 다시 갔을 때도 여전히 아까와 마찬가지였다. 이리하여 그는 자기 몸에 지니고 있던 패옥을 창문 틈에 올려놓고 그 자리를 떠났다.
하루가 지났을 때, 고생은 어머니의 처소에서 아가씨와 다시 마주쳤다. 그가 방에서 물러나오자, 아가씨도 뒤따라 나오면서 그에게 말을 걸었다.
“당신은 저를 의심하시나요? 사람마다 각자 걱정거리가 다른 법이라 다른 사람에게 함부로 말할 수 없는 그런 경우도 있게 마련이지요. 이제 와서 당신의 의심을 없애려고 해봐야 그것이 어떻게 가능하겠습니까? 그런데 한 가지 급한 일이 있어 당신의 도움을 받아야겠어요.”
무슨 일이냐고 묻는 고생에게 그녀는 다음과 같은 말을 늘어놓았다.
“저는 임신한 지가 벌써 여덟 달이나 되었기 때문에 조만간 아이를 낳을 것 같아요. 저의 신분이 아직 분명치 않은 까닭에(역주 2) 당신을 위해 아이를 낳을 수는 있지만 기를 수는 없습니다. 몰래 당신 어머니께 말씀드리고 유모를 한 명 찾으세요, 양자를 들였노라 가장하시면서. 절대로 제가 낳았다는 말은 하면 안 됩니다.”
고생이 그러마 허락하고 어머니께 이 사정을 말씀드리자, 그녀는 웃으면서 신기해했다.
“이 아가씨는 정말로 이상하구나! 며느리로 들인다 할 때는 안 된다고 하더니 도리어 우리 아들과 사통하기를 원하다니 말야!”
그렇지만 어머니는 기쁨에 겨워 아가씨의 계획대로 일을 처리하면서 아기가 태어나기를 기다렸다.
다시 달포 가량이 지났다. 아가씨가 며칠이나 나타나지 않자 어머니는 의구심이 들어 그녀의 집으로 찾아갔다. 대문은 꼭 닫혀 있었고 사방은 썰렁하기만 할 뿐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한참 동안 문을 두드린 다음에야 아가씨가 비로소 헝클어진 머리채에 때가 덕지덕지하게 엉망이 된 얼굴로 안에서 나왔다. 그녀는 문을 열어 고생의 어머니를 안으로 들이더니 다시 대문에 빗장을 질렀다. 어머니가 그녀의 방으로 들어서자 뜻밖에도 갓난아이가 침상 위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낳은 지 얼마나 되었느냐?”
어머니가 놀라며 물었더니,
“사흘 되었어요.”
하는 대답이었다. 강보를 들추고 살펴보니 사내아이였는데, 넓은 얼굴에 이마가 시원스러운 잘생긴 아이였다. 고생의 어머니가 기뻐하면서 물었다.
“네가 이미 나를 위해 손자를 낳아주었다만, 너는 의지할 데라곤 없는 혈혈단신인데 장차 누구에게 의탁하려는 것이냐?”
“제 구구한 속내를 어머님께 다 말씀드릴 수가 없군요. 밤이 되어 인적이 드물어지면 아이를 안고 가셔도 괜찮아요.”
어머니는 집으로 돌아와 아들에게 그 이야기를 했고, 두 사람 모두 아가씨가 범상한 사람이 아니라고 느꼈다. 밤이 되자 어머니는 그 집으로 건너가 아이를 안고 돌아왔다. 다시 며칠이 지난 어느 날 한밤중, 아가씨가 갑자기 문을 두드리고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손에 가죽 주머니 하나를 들고 웃으면서 말했다.
“저의 큰일이 마침내 이루어졌습니다. 이제 우리는 헤어지게 되었어요.”
고생이 다급하게 무슨 까닭인지를 묻자, 그녀는 이렇게 대답했다.
“당신이 우리 어머니를 봉양해 준 은덕을 저는 항상 가슴에 새기고 있었답니다. 지난번에 남녀간의 일을 두고 한번은 괜찮아도 두 번은 안 된다고 말했던 이유도 남녀간의 잠자리에서 보은하려 했던 것이 아니기 때문이지요. 당신은 가난해서 아내를 살 돈이 없기 때문에 당신을 위해 대를 이을 아이를 낳아주려고 그랬던 것입니다. 원래는 한번만으로 아이를 잉태할 수 있다고 여겼는데 뜻밖에도 달거리가 또다시 나타나더군요. 그래서 결국 애초의 말을 어기고 다시 당신과 동침했던 것입니다. 지금은 이미 당신의 은혜를 갚았고 저의 소원도 이루어졌으니 더 이상 아무런 미련도 없습니다.”
“주머니 안에 무엇이 들었소?”
“원수의 대가리입니다.”
그녀는 주머니를 치켜들어 안을 들여다보게 했는데, 그 안에는 사람의 머리통 하나가 수염과 머리카락이 서로 뒤엉킨 상태로 피범벅이 되어 있었다. 깜짝 놀라며 다시 그렇게 된 사정을 캐묻는 고생에게 아가씨는 다음과 같이 설명해 주었다.
“이전에 당신에게 말하지 않았던 이유도 사실은 비밀이 지켜지지 않고 누설될까 염려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일이 다 끝났으니 이야기해도 무방하겠지요. 저는 절강 사람입니다. 아버지께서는 사마(司馬) 벼슬을 지내셨는데 원수의 모함으로 돌아가셨고 재산마저 죄다 몰수당했지요. 저는 늙은 어머니를 업고 도망쳐 나와 이름을 감추고 얼굴을 드러내지 않은 채 삼 년 동안 숨어서 살았습니다. 즉시 복수하지 못한 까닭은 늙은 어머니가 계시기 때문이었지요.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에는 또 태아가 뱃속에서 꿈틀거려 다시 한동안이 지체되었습니다. 예전에 한밤중에 밖에 나갔던 것은 다른 뜻이 있어서가 아니었어요. 원수의 집과 가는 길을 확실하게 몰라 행여라도 차질을 빚을까 봐 걱정이 되어 그랬던 거지요.”

다음주에 계속

<역주>
1.연동: 여성처럼 취급하며 데리고 희롱하는 소년. 연동은 본래 예쁜 아이라는 뜻이지만 여기서는 남색의 대상을 가리키는 말로 쓰였다.
2.협녀와 고생이 공개적인 부부의 명분을 갖지 않았음을 가리킨다.


■해설
한나라는 제자백가 중에서 가장 전아한 유가를 통치이념으로 내세웠지만, 피비린내 물씬한 역사의 한가운데서 단련된 통치자들은 또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명분과 당위만으론 자신이 가진 것을 지켜낼 수 없다는 것, 실력을 행사하여 ‘맞장’을 떠오는 정적(政敵)들을 상대하기 위해서는 자신도 그 이상의 실력을 갖추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말입니다.
아울러 그들은 원하는 것을 그대로 드러내선 안 된다는 이치와 더불어 가진 것을 오래도록 보전하기 위해서는 드러내야 할 것과 그 뒤에 감춰야 할 것이 따로 있다는 이치도 분명히 깨닫고 있었지요.
이리하여 중국 역사를 움직이는 두 가지 힘 중에서 문아한 유사(儒士)들은 전면에 내세워진 반면, 피로 물든 무도한 역사와 그 주인공인 협사(俠士)들은 그늘 뒤로 감춰지게 되었습니다.
협(俠)은 원래 ‘사람 인(人)’에 ‘겨드랑이에 낄 협(夾)’자가 보태져서 만들어진 글자입니다. 그 모양만으로도 약한 사람을 끼고 도는 행위, 혹은 그런 사람을 의미하지요.
사마천은 ‘사기’에서 약자가 강자에게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으로 자객을 내세웠는데, 중국 역사에서는 이렇게 남의 어려움을 전문적으로 처리해 주는 해결사 역할의 임협(任俠)이 수시로 등장합니다.
비록 역사의 전면에 나선 주인공은 아니었지만 자신을 알아준 지기(知己)에게 보답하거나 세상의 불의에 맞서다 이슬처럼 스러져간 영웅들의 비장미는 언제나 우리 보통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며 열광하게 만드는 핵이었고, 덕분에 그들은 현실 아닌 가상의 세계에서는 늘 주역의 자리를 꿰차곤 했지요. 지금도 끊임없이 재생산되는 무협지나 무협영화는 이를 방증하는 산 증거라고 하겠습니다.
한밭대 외국어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