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있는가, 죽었는가? 기어코 자살하고 말았는가, 아니면 꾸역꾸역 살아냄으로써 비참에서 마침내 꽃을 피웠는가?
미조구치 군, “남들에게 이해되지 않는다는 점이 나의 유일한 긍지였다”고 말했던가. 비범한 인물들은 분명 남들에게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비범’이 이미 이해되지 않음의 다른 말이니까. 그런데, 결코 비범하다고는 할 수 없는 사람이 이러한 긍지를 지니고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 비교적 명민하고 비교적 강한 자아를 지니고 있지만, 그리고 어느 시인 이상으로 미에 대한 섬세한 촉수를 지니고는 있지만, 여전히 범인에 불과한 자네에게 이러한 긍지는 과연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간단히, 일종의 위악이겠지. 조소와 경멸에 둘러싸여 단 한번도 참된 따뜻함 속에 있어 보지 못한 자네, 말더듬이라는 사소한 결함을 지나치게 의식하면서 세상과 자신을 처음부터 선 그어놓던 자네, 참된 미는 숨어 있는 법이고 그리하여 철저히 버림받는 자만이 볼 수 있다고 믿던 자네,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놈이란 말이야!”라는 킬킬거림을 숱하게 들어오면서 자네는 마침내 누구에게도 이해되지 않겠노라고 스스로 칼날을 벼리었겠지. 자기 존재성이 거기에 있다고, 자기의 독특한 명예가 거기에 있다고, 그렇게 이를 악물며 결기를 끌어올렸겠지.
그러나 미조구치여, 살아남기 위하여 방패 하나 세우는 일은 이 세상에서 너무도 흔한 일이다. 세상 사람 모두가 그러한데 자네의 위악이 특별히 눈에 띄어야 할 이유도 없다. 중요한 것은 집요해지는 일, 스스로 확신하는 일, 그리하여 자기 자신에게 완벽히 속아넘어가는 일이지. 완벽히 믿으면, 완벽히 속으면, 존재는 거기에서 새롭게 시작된다. ‘절대’란 없으니까, 모든 ‘절대’는 자기 안에서 시작되니까.
그렇게 되었을 때 이제 위악은 따로 없다. 자기 자신이 위악이니까. 세계 전체가 위악이니까. 그때엔 또한 긍지도 따로 없다. 이해되거나 이해되지 못하거나, 거기엔 그저 자기 운명의 의미를 저녁 그림자처럼 길게 늘어뜨리고 있는 서글프면서 아름다운 한 ‘존재’가 있을 뿐이다. 긍지는 과연 따로 없다.
미조구치 군, 자네는 꿋꿋했고, 그만하면 충분히 집요했다. 자기 인생에도 충분히 성실했다. 그러나 한 가지 실수가 있는데, 긍지를 너무 자주 떠벌렸다는 점이 아쉬웠다고 말한다면 자네는 동의할 것인지?
| 긍지 역시 따로 없다는 것을 자네가 몰랐던 것이 내게는 솔직히 조금 아쉬웠다네. 그런데 나의 이 말은 비난인가? 질타인가? 훈계인가? 아무것도 아니다. 자네를 사랑하기에 감히 친근한 척 시비 한번 걸어보는 것일세. 내 쪽으로도 고개 한번 돌려보라고 툭 한번 쏘아보는 것일세. 미조구치, 날 잡아 그림 좋은 강가에서 이박삼일 술이나 함께 마시자. 위악이니, 긍지니, 자기 존재성이니… 하! 다 쓸데없는 일이었지. 그렇지 않은가, 미조구치! |
이서인 소설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