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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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지상의 세계문화기행]<75>영화 ''비정성시'' 무대 대만 주펀

그 골목 그 찻집 슬픔은 없고 평화만이…
대만의 북부 해안 도시 지룽(基隆)에서 버스를 타고 동쪽으로 약 1시간 정도 산길을 따라 올라가면 주펀이란 마을이 나온다. 이곳은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산골 마을인데, 19세기 말에 금광이 발견돼 제2차 세계대전 후에는 금광 채굴로 한때 번성했다. 그러나 요즘 활기를 띠게 된 것은 대만 영화 비정성시 때문이다. 허우샤오셴(侯孝賢) 감독의 비정성시가 1989년 베네치아 국제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한 후 영화의 배경이 되었던 이곳에 관광객들이 몰리기 시작했다.
버스에서 내리면 세븐일레븐 편의점이 보이고, 그 옆의 지산가(基山街)라는 골목길에는 알록달록한 색깔이 어우러진 기념품가게, 음식점들이 죽 들어서 있다. 예스러운 골목길의 낭만을 느끼며 걷다 보면 중간에 돌계단 길이 가로지르는 십자로가 나온다. 거기서 오른쪽 비탈을 내려다보면 영화 속에서 본 듯한 풍경이 펼쳐진다. 이 돌계단 길이 수치로(竪崎路)이고, 여기에는 비정성시, 아매차주관(阿妹茶酒館)이란 간판을 내건 찻집들이 있다.
영화는 비정성시란 찻집에서 촬영했고 아매차주관에서도 찍었다는데, 원래 다른 곳에 있다가 이곳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입구 풍경이 영화에 나오는 조선루(朝鮮樓)와 비슷한데, 대만 사람들은 조선이란 이름에서 이국적인 정서를 느꼈던 것일까? 영화 속에서 일제로부터 해방된 대만 사람들은 이런 곳에서 술을 마시며 암울한 현실에 대해 울분을 토했다.



◇산꼭대기에 들어선 가옥들


비정성시는 1945년부터 1949년까지 대만 사람들이 겪는 비극을 다룬 영화다. 린아루(林阿祿)란 사람에게 네 아들이 있었는데 첫째는 장사를 하고, 제일 공부를 많이 한 둘째는 일본군 군의관으로 대륙으로 갔다가 실종되고, 셋째는 미친 불량배가 되어서 대륙에서 돌아온다. 그리고 여덟살 때부터 벙어리에 귀머거리인 넷째는 고향에서 사진관을 운영하며 평화롭게 산다.
일본이 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한 후 물러갔으나, 해방이 대만 사람들에게 행복을 가져다 주지는 않았다. 중국 대륙의 국민당 정부는 천이(陳儀)라는 관리를 대만 행정장관으로 파견하는데, 그와 함께 대륙에서 몰려온 부패 관리들은 사리사욕을 채우며 새로운 점령자처럼 행동한다. 물가와 실업률이 치솟으면서 대만 사람들의 불만이 팽배해졌고, 드디어 1947년 2월27일 타이베이시 전매청 앞에서 세금이 붙지 않은 담배를 팔던 여인을 관리들이 구타하는 사건이 벌어진다. 다음날인 2월 28일 대대적인 시위가 일어나자 이에 놀란 행정장관 천이는 대륙의 국민당 정부에 지원을 요청하고, 장제스(蔣介石)는 군대를 파견한다. 3월 8일 지룽항에 상륙한 국민당 정부군은 대만 원주민을 대대적으로 탄압하며 약 2만명을 살해하는데, 이것이 이른바 ‘얼얼바’(2·28)사건이다.
영화에서도 이 사건으로 수많은 청년이 잡혀가고 죽으며 린씨 일가도 몰락한다. 첫째는 대륙에서 온 마약 밀수범들과 싸우다 죽고, 아무 죄도 없는 넷째는 군인들에게 끌려가 사라진다. 마침내 마약 밀수에 연루돼 고문을 받고 완전히 실성한 셋째아들만 남게 된다. 그리고 1949년 마오쩌둥(毛澤東)에게 패한 국민당 정부군이 대만으로 몰려들게 된다.
대만에서는 대륙에서 국민당 정권과 함께 온 사람들을 외성인(外省人)이라 부른다. 명나라가 망하고 청나라가 흥하던 17세기 중반 무렵부터 명나라 장수 정성공(鄭成功)을 따라 대만에 와서 300년 넘게 터를 잡은 푸젠(福建), 광둥(廣東)성 출신들을 본성인(本省人)이라 일컫는다. 이 본성인들과 외성인들 사이에 발생한 ‘얼얼바 사건’의 상처는 아직도 아물지 않아 수많은 정치적 갈등의 원인이 되어 왔다.
그러나 현재 주펀에는 평화와 관광객의 호기심 어린 낭만이 넘쳐 흐르고 있다. 관광객들은 이곳에 있는 평범한 사당이나 퇴락한 금광 박물관보다도 예스러운 목조 가옥들이 들어선 골목길의 낭만을 찾아온다. 복잡한 도시를 떠나 바다와 산골의 아름다운 풍광에 취하고, 고즈넉한 골목길의 술집이나 찻집에서 잠시 세상을 잊으며 은둔하고 싶은 사람에게 주펀은 놓치기 아까운 곳이다.
여행작가(blog.naver.com/roadjisang)



◇골목길 지산가


이번 대만 여행은 9월 9일부터 15일까지 했는데, 도착하던 날 첸수이볜(陳水扁) 총통 퇴진 데모가 시작되고 있었다. 비가 주룩주룩 오는데 빨간색 티셔츠를 입은 사람들이 중정 기념당 광장 앞에 모여서 엄지손가락을 거꾸로 내리며 “아볜 샤타이(阿扁·천수이볜 하야)”를 외쳐댔고, TV에서는 철야로 진행되는 시위를 계속 중계했다.
첸수이벤은 본성인과 외성인의 갈등 속에서 본성인의 지지를 얻어 당선되었지만, 무능과 측근 비리로 국민 대다수가 등을 돌린 상황이다. 이 시위를 주도하는 있는 이가 첸수이볜과 같은 당에 있던 전 민진당 대표 스밍더(施明德)라는 사실이 첸수이볜을 더욱 아프게 하고 있다. 그럼에도 첸수이볜은 독립과 유엔 가입을 내세우며 계속 자기 길을 가겠다고 고집부리고 있다. 많은 이들은 자신의 무능과 부패를 슬그머니 덮고 정치판을 독립과 반독립 구도로 나누려는 의도가 있다고 본다. 9월 15일에는 100만명 정도가 모여 시위를 했다. 그리고 9월 16일부터는 첸수이볜 지지자들이 약 10만명을 목표로 시위를 벌인다고 했는데, 과연 대만은 어디로 갈까?

>> 여행 정보
주펀 가는 길은 여러 가지다. 타이베이역 9번 출구로 나와 지룽 가는 버스를 타고 40분 후쯤 종점에서 내리면 육교가 나온다. 그곳을 건너서 진과스(金瓜石)행 버스를 타고 약 1시간 정도 가면 주펀이 보인다. 다른 방법은 지하철역 충샤오푸싱(忠孝復興)역에서 내려 1번 출구로 나와 진과스행 버스를 타면 된다. 약 1시간20분 소요되고, 요금은 80NDT(약 2400원)로 거스름 돈을 안 주니 잔돈을 준비해야 한다. 타이베이에서 당일치기 여행도 가능하지만, 주펀에서 민박을 할 수도 있다. 숙박비는 3만원이 조금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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