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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구려" 폄하?…그래도 386엔 뜨거운 청춘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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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23일 ''6월항쟁 20주년 콘서트'' 여는 가수 안치환
‘그래 나는 386이다. 그 누가 제 아무리 싼값에 폄하해버려도 그날의 투쟁의 역사 또 눈물의 함성 바로 거기 우리의 뜨거운 청춘이 있었다. …그 언제부턴지 몰라도 386이란 그 말이 오히려 부담스러워 숙이며 살아왔는데 그 누가 더럽히는가, 그 누가 이용하는가. … 더 이상 욕하지 말라 욕되이 마라. 우리의 순결한 유월을 난 지키고 싶다. 힘내라 386이여.’
가수 안치환(42)이 만든 노래 ‘그래, 나는 386이다’의 일부다. 본인이 직접 가사를 쓰고 곡을 만들었다. 격정적인 음색으로 포효하는 듯한 빠른 템포의 노래지만 가락에는 애조가 묻어 있다. 아직 공개되지 않은 이 노래는 23일 연세대 백주년기념관에서 열리는 6월항쟁 20주년 기념 콘서트 ‘그래, 386이다!’에서 첫 곡으로 선보일 예정이다. 랩처럼 가사 중심으로 흐르는 이 노래를 듣고 있노라면, 안팎으로 치이는 요즘 386세대의 아픔이 가슴에 스며들어 동세대 입장에서는 눈시울까지 뜨거워진다.
“세상이 욕하는 부류의 386은 기실 100명도 안 될 겁니다. 암담하고 힘들었던 시절을 지나온 수많은 386들은 지금 아이들 교육문제로 고민하면서 마누라랑 싸우고, 명예도 없지만 여전히 남아 있는 가슴속 열정 때문에 홀로 고민도 하고, 좌절하고, 그러면서 가끔 아이들 손잡고 촛불을 들고 나가기도 하는 그런 이름 없는 386들이 대다수입니다. 나는 이들에게 위안을 주고 힘이 될 수 있는 그런 노래를 만들고 싶었습니다.”
안치환을 용산 효창공원 옆 백범기념관에서 만났다. 기사가 딸린 수입 밴을 타고 매니저와 코디네이터들까지 동행하는 대중가수들과는 달리, 그는 직접 자신이 운전하는 승합차를 끌고 나타났다. 유월의 강렬한 햇살이 따가운 날이었다. 청바지에다 티셔츠를 걸쳐입은 그가 환한 미소를 띠고 뛰어왔다. 그는 생각했던 것보다 늙지는 않았고, 여전히 기운 생동하는 따뜻한 386이었다.
지금은 노래방 인기가요가 돼버린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를 안치환이 만들었다는 사실은 미처 몰랐다. 뜨겁고 어두웠던 시절 애국가처럼 불렀던 이 노래는 입에서 입으로 흘러다니는, 작곡자 미상의 구전가요로만 알았다. 사실 그 시절에는 누가 만들었느냐가 그리 중요한 문제는 아니었다. 세상을 움직이고 사람들 가슴에 불을 지피는 게 더 소중했다. 이제 6월항쟁으로부터도 다시 20년이 흘렀다. 시대도 변했다. 그 시절의 젊은 주역이었던 이른바 386들 중에는 제도권으로 진출해 그들이 비판했던 기성 세대와 다를 바 없어 많은 욕을 먹기도 한다. 안치환은 말한다. 그 한줌도 안 되는 일부 386 때문에 하루하루 힘들게 살아가는 수많은 386들을 매도할 수는 없다고.
“그 시절 나와 비슷하게 노래를 시작한 사람들이 많았지만 지금까지 활동하는 이들은 적어요. 세대별로 젊은 피가 수혈도 되고, 현실을 얘기하는 노래도 나와 줘야 하는데, 고령화된 노래운동패들의 노래만으로는 젊은 세대에게 공감을 주기 쉽지 않습니다. 그 시절에는 오히려 엄혹한 시대 상황으로 인해 프리미엄까지 안았어요. 노래의 작품성보다는 시대의 분위기가 더 큰 역할을 한 거지요. 나도 그 시대의 유산을 받은 사람이지만, 그동안 누릴 것 다 누리면서 타협하며 대중의 인기에 영합한다고 욕도 먹었지요. 하지만 수많은 노래패들이 명멸했어도 지금 살아남은 그룹이 몇 개나 됩니까?”
안치환의 고향은 미공군 사격장 문제로 시끄러웠던 경기도 화성 매향리다. 어린 시절부터 동네에서 “노래 잘하는 쟤 !”로 통했다. 초등학교 졸업식 예행연습 날에는 교장이 “치환이 나와서 노래 한번 해보라”고 하자 엉뚱하게도 ‘빈대떡 신사’를 불러 좌중을 웃겼다. 할아버지도 노래를 잘 불렀고, 큰형도 가수를 하려다 포기했을 정도로 ‘끼’가 흐르는 집안이었다. 대학에 들어가 대학가요제나 나가볼까 생각하던 평범한 청년 안치환은 연세대 노래패에 들어갔다가 어쩔 수 없이 그 시대의 분위기 속에서 고뇌하는 대학생으로 변했다. 기타를 아주 잘 쳤다. 노래패에서는 당연히 보배였지만, 세미나 때는 모르는 걸 부끄러워하지 않고 솔직하게 선배들에게 대놓고 묻는 자유로운 기질의 청년이었다. 각 대학 노래패들이 모여서 만든 ‘새벽’에 들어갔고, 다시 ‘노래를 찾는 사람들’로 옮겼다. 하지만 그는 ‘아마추어’들과 자신의 길이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고 뛰쳐나왔다. 당시에는 선배나 주변 운동패들로부터 엄청나게 욕도 먹었다. 따지고 보면 자신의 노래인생을 분명히 설계하고 지금의 ‘안치환’을 만들어낸 건 그런 고통의 시절을 감수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했다.

그에게 ‘저항가수’라는 수식어가 어떻게 다가오느냐고 물었다. 그는 “중요한 건 가수 안치환일 뿐, 수식어는 의미가 없다”고 일축했다. 그가 그래도 저항가수라는 수식이 싫지는 않다고 덧붙였을 때, 예전처럼 싸워야 할 명백한 ‘적’이 사라진 지금 저항할 대상은 무엇인지 물었다.
“예전에는 노래운동의 주제가 선명했지요. 어떤 형식의 노래를 부르든, 심지어 찬송가를 불러도 환호했지만, 지금은 그런 세상이 아닙니다. 당연히 고민도 많이 하지요. 하지만 그 시절이나 지금이나 노래는 도구의 한계를 넘어서 작품성을 담보해야만 생명력을 지닐 수 있어요. 사람들에게 아무리 많은 것을 얘기해도 채워지지 않는 파행적 정서를 노래함으로써, 모든 이들이 좀 더 균형적인 정서로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는 그런 노래를 부르고 싶습니다.”
이번 주말 연세대 백주년기념관 무대에는 손병휘 윤미진 등 후배 가수들과 함께 선다. ‘그래 나는 386이다’를 비롯해 33곡이나 부른다. 신동호 시인이 386을 위한 시를 지었고 직접 낭송도 한다. 안치환은 “우리가 욕을 하던 기성세대가 돼버렸지만, 386세대가 가지고 있는 힘은 여전히 남아 있다”고 말한다. 386의 역사성과 영광을 정치권의 몇 명이 다 가져가는 것 같아 속상하고 분노하지만, 조금도 부끄러워할 게 없다고 강조한다. 지나온 시대에도 그랬듯이 지금은 열심히 가족을 위해 살고 있고 파김치가 되도록 부지런히 뛰는 대다수 386들이여, 힘내라고 다독인다. 그리고 노래한다.
-이 모든 외로움 이겨낸 바로 그 사람, 누가 뭐래도 사람이 꽃보다 아름다워.
문화팀장 jhoy@segye.com, 사진 김창길 기자

■안치환은
▲1965년 경기도 화성 출생
▲1984년 연세대 입학, 학내 노래패 ‘울림터’ 활동
▲1986년 노동자문화예술운동연합 산하 ‘새벽’ 활동
▲1988년 연세대 졸업, ‘노래를 찾는 사람들’ 활동
▲1989년 솔로 활동 시작
▲1990∼1995년 첫 독집 음반 ‘안치환 첫번째 노래모음’ 시작으로 ‘내가 만일’ 등 5장의 음반 발표
▲1997년 포크 앨범 ‘노스탤지어’, 5인조 밴드 ‘안치환과 자유’ 결성
▲1998∼2004년 5집 음반 ‘디자이어’ 등 8집음반까지 발표
▲2006년 기획음반 ‘비욘드 노스탤지어’
▲2007년 9집 음반 ‘처음처럼’
▲수상: 한국 프로듀서연합회선정 가수상(1997년), 오늘의 젊은 예술가상 대중예술부문(1999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