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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초기에도 ''술·도박·매춘과의 전쟁''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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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 생산력 발전으로 인구 20만명 육박
급속한 도시화 따른 치안문제 다수 발생
성리학적 규범과 잣대가 엄격했던 조선 전기에도 술과 도박, 매춘과의 전쟁은 있었다. 이정수 동서대 교수는 15세기 말 서울은 음주와 매춘, 사치향락 풍조가 급속히 퍼져 정부가 수차례 금주령과 사치금지령을 발표할 정도였다고 주장했다.
이 교수가 다음달 7일 ‘2007 서울역사학술대회’에서 발표할 논문 ‘조선전기 서울의 경제기반과 경제생활’에 따르면, 조선왕조 개창과 함께 조성된 계획도시 서울은 15세기 말 비약적인 상업 발전을 이루게 된다. 사대문 안 인구는 급속히 늘어 16세기엔 20만명에 육박했고, 중국·일본·여진과의 교역 발달로 서울은 동아시아 국제교역 중심으로 떠올랐다. 국내 유통경제 성장과 활발한 삼국 무역으로 서울에는 전례없이 돈이 넘쳤다.
양이 넘치다보니 남들보다 좀더 질 좋은 물건을 구하고 싶은 욕망도 꿈틀댔다. 양반·지주층 위주로 국산보다는 일본산, 일본산보다는 중국산 의복을 선호하는 풍조가 급속히 확산됐다. 중종이 1513년(중종 8) 하교를 통해 “도성 내 사대부에서 서민에 이르기까지 집, 의복, 수레, 혼례 등 다방면에 걸쳐 사치를 경쟁하여 귀천과 존비의 질서가 무너지고 있다”고 경계할 정도였다. 술 소비도 크게 늘었는데 1541년 진휼청 통계를 보면 술을 빚기 위해 하루 소비되는 쌀의 양은 1000여석에 이르렀다.
범죄도 강상(삼강·三綱과 오상·五常)과 윤리에 어긋나는 차원에서 벗어나 점차 절도, 사기, 살인, 위조 등 경제범죄 쪽으로 변화했다. 음주나 간음, 도박 등으로 재산을 탕진한 서민과 양반층이 다시 유흥비를 마련키 위해 도적질을 하는 경우도 많아졌다.
특히 1538년 유곽을 찾아 상경했다 목이 잘린 채 시체로 발견된 전북 임피현(군산)의 직업군인 이응 사건은 조정에 큰 충격을 던졌다. 조선 중종 때 법전 ‘대전후속록‘ 형법에는 “유녀(游女)가 적발되면 양인의 경우 노비로, 공·사 노비의 경우 곤장 100대와 유형(칼·도리께를 차고 멀리 떠나 강제노동하는 것) 3000리에 처한다”고 규정돼 있다.
하지만 당시 사치의 중심에는 양반·지주층이 있었으며 특히 특권층이 거대 상인과 결탁해 엄청난 이익을 보장하는 사치 무역에 깊숙이 관여해 정부의 여러 노력은 별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고 이 교수는 설명했다.
송민섭 기자 stsong@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