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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비울미술관의 전경. 철제빔을 이용한 공간은 식물원이고, 기와지붕을 얹은 공간은 미술관이다. |
경기도 과천시 갈현동의 제비울미술관도 거기서 자유로울 수 없다. 제비울이라는 단어에 매혹되면 사계절 내내 따뜻한 봄일 것 같지만 계절은 어느 곳도 비켜가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어떠랴. 제비울미술관 앞에 서니 제일 먼저 바짝 마른 수국이 객을 반긴다. 잎은 모두 그대로인 가운데 갈색으로 변한 자태에서는 다소곳한 여인네의 품성 바른 모습이 보이는 듯하다. 서울 도심에서 한 시간이면 닿을 수 있는 곳에 이런 공간이 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수국뿐인가. 제비울미술관은 전통과 현대가 결합된 건축미학을 여실하게 보여준다. 미술관은 전통 기와를 얹은 한옥인데 그 옆의 식물원은 철강 기둥을 세운 현대식 양옥이다. 대부분의 미술관은 전통만을 따르거나 디지털적인 건축미학만으로 승부하는 시대인데… 잠시 이 공간의 주인이 누구인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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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찬바람이 점점 강해지는데도 단풍 몇 잎은 바싹 마른 줄기에 매달려 가을의 추억을 여전히 간직하고 있다. (왼쪽) ◇제비울미술관은 그림에 관심이 없는 사람에게도 산책하며 사유할 수 있는 나무계단이 사방으로 연결돼 있다. |
“우리 관장님은 젊어요. 아직 쉰 살이 안 되셨을 걸요? 우리 미술관의 처마는 전국 방방곡곡의 한옥을 산 다음 거기서 옮겨온 처마로 만든 거예요. 모르죠. 우리 관장님이 왜 그런 고집을 피우셨는지. 그런데, 그렇게 옮겨온 처마가 제각각이라서 균형이 안 맞는 곳이 많아요.”
미술관의 큐레이터 김가현씨는 설립자 흉을 보는 듯, 자랑을 하는 듯 띄엄띄엄 미술관 이력을 소개하면서도 꽤 조심스러운 눈치다.
제비울미술관의 설립자는 신창건설의 오너인 김영수씨다. 그게 또 이해가 가지 않는다. 건설회사를 운영하고 있으니 최신 공법으로 미술관을 지어 내외의 눈길을 끌고 싶었을 것 같은데 시골 마을의 한옥을 사들인 다음 처마를 옮겨와 미술관을 지었다니 얼마나 미련한 문화행동가인가. 하지만 미련하지 않다. 세상은 변하여 이제는 문화복합공간이 주목받는 시대가 된 것이다. 직접 만나 확인하지 못했으니 장담할 수 없으나, 김영수 관장은 동서양이 만나는 복합 건축을 통해 미술관의 새로운 덕목을 발현하고 싶었던 것 아닐까.
미술관으로 오르는 층계에 서서 하늘을 올려다본다. 디귿 형태를 이룬 기와 처마 사이로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이 드러난다. 기와만 있는 게 아니다. 아래쪽으로는 서양식 구조물이 자리 잡고 있다. 그러니까 동양과 서양의 구조물 사이로 늦가을의 하늘이 양동이에 갇힌 듯이 시야 가득 들어오는 것이다.
“우리 미술관은 입장료가 없거든요. 주말이면 200명 정도가 찾아오는데 산책도 할 수 있고, 그림도 볼 수 있고. 이만하면 괜찮은 공간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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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비울미술관의 뒤편은 나무와 꽃들의 공간이다. 미술관 사람들은 야생 동물의 겨울나기를 위해 떨어진 모과를 줍지 않는다.(왼쪽) ◇전통과 현대를 접목한 제비울미술관의 아름다움은 전시관 입구에서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다. 한옥과 양옥의 구조물 사이로 올려다보이는 디귿자 하늘은 생경하면서도 부드러운 공간미를 자아낸다. |
괜찮은 게 아니라 썩 좋은 공간이다. 미술관 뒷동산으로 올라서니 거기, 나무 층계가 길게 이어지고 층계 전후좌우로는 각양각색의 식물 이름을 알리는 팻말이 꽂혀 있다. 용머리·범부채·붉은인동덩굴·도라지·금꿩의다리꽃…. 저마다 푸른 기운은 사그라졌지만 겨울 지나고 나면 다시 싹을 밀어올려 미술관을 찾는 사람들에게 감탄사를 자아내게 할 게 분명하다.
뒷동산의 직립한 나무들은 하오의 그림자를 드리운 채 푹푹 빠지는 낙엽을 거느리고 있다. 모과나무에는 천연의 노란빛을 띤 모과들이 점점이 달려 있고, 땅에 떨어진 모과에는 야생동물들이 갉아먹은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다. 감기 기운 다스릴 때 요긴한 모과차를 담으려고 몽땅 수확하기보다는 야생동물의 겨울나기를 위해 수확의 욕심을 버린 흔적이다. 소문나는 것에 연연하지 않는 나눔의 한 방식이다.
나무 계단을 하나씩 디디며 겨울을 예감하는 바람과 맞서 본다. 쌀쌀한 바람 탓에 사람들의 인기척은 거의 들리지 않는데, 나무들 사이로 자동판매기에서 커피 한 잔씩을 빼들고 올라오는 두 명의 여자가 보인다. 모락모락 김이 솟는 종이컵에서 온기가 느껴진다.
“커피 들고 있는 사진 좀 찍어도 될까요.”
“아, 우리 말인가요? 그러세요.”
“종이컵 들고 있는 손만 찍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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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은주가 뚝 떨어지면서 한없이 길 것 같았던 가을도 이제 막을 내려간다. 하룻밤 사이 얼음이 얼면서 은행잎도 솔잎도 얼음에 갇혀 버렸다. ◇여름과 가을을 지나오면서 보랏빛으로 물들었던 수국이 잎 한 점 떨어뜨리지 않은 채 갈색으로 빛나고 있다. |
사진 찍겠다고 하면 손사래를 치는 사람들이 많으니 손만 찍겠다고 한 것인데, 두 사람은 왜 손만 찍으려 하느냐고 의아해하는 얼굴이다. 그들뿐이 아니다. 조금 있으니 중년 남녀 한 쌍이 추억을 반추하듯이 나직하게 속삭이며 계단을 오른다. 할머니, 중년 주부, 소녀들 일가족이 서로의 손을 잡아끌며 계단을 오르내린다. 날씨가 아무리 차가워도 세대와 세대가 서로 손을 잡으면 두려울 게 없는 법, 바람이 나뭇잎을 다 떨어뜨릴 듯이 기세를 부리다가도 이내 수그러드는 듯하다.
제비울미술관이 이런 공간으로 태어난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다. 김영수 관장은 청계산 자락 과천에서 14대째 살고 있는 사람이다. 그러니 현대와 과거가 공존하는 과천의 캐릭터에 맞는 예술 공간을 만들고 싶었던 것이며, 기왕이면 청소년들이 예술 향취를 느낄 수 있는 미술관을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입장료를 안 받는 것은 물론 방학 때면 자녀와 학부모가 함께 참여하는 미술교육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것도 그런 초심에서 비롯된 것이다.
나무 계단을 오르내리는데 솔잎 위에 단풍잎 몇 점이 걸려 있다. 푸른 기운과 붉은 기운이 맞물려 있는 게 기막히게 곱다. 그 둘만이 어울리고 있는 것은 아니다. 소나무 뒤쪽으로는 미술관의 기왓장이 검푸른 빛을 내면서 한옥의 곡선미를 자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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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름과 가을을 지나오면서 보랏빛으로 물들었던 수국이 잎 한 점 떨어뜨리지 않은 채 갈색으로 빛나고 있다. |
전시장 안으로 들어선다. 화가 이흥덕의 작품들이 전시되고 있는데, 단발머리 소녀 모습의 그림들이 눈길을 끈다. 그림들은 동심에 가까운 모습을 많이 담고 있지만 의미만은 꽤 진지하다. 이름하여 ‘저항의 암시적 풍경전’이다. 얼핏 서로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그림과 전시회 명칭이지만 알고 보면 그렇지도 않다. 소녀는 성년 이전의 애매한 지점에 서서 세상의 가르침 그대로 때로는 순진하고, 때로는 교활한 눈빛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소녀의 눈빛은 ‘당신들이 나를 이런 눈빛의 소녀로 만들었다’고 외치는 은유의 다른 표현이다.
이런 전시를 비롯해 제비울미술관은 유명하든 유명하지 않든 아우라를 획득하고 있는 화가들의 전시회를 계속 연다. 23일부터는 디지털 시대의 인간 관계와 소통을 음미하게 하는 홍성대의 전시회가 열리니 이흥덕의 작품과는 또 다른 향취가 제비울을 물들일 게 틀림없다.
소설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