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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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강점기 항일운동, 청림교·원종교를 아시나요?

민족종교협 연변대학 세미나 통해 밝혀진 실체
◇한국민족종교협의회는 지난해 12월 중국 연변대학에서 한국민족종교운동사와 관련한 세미나를 갖고 일제강점기 민족종교였던 청림교와 원종교의 항일행적을 발굴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사진은 세미나 장면.
한국의 민족종교인 청림교(靑林敎)와 원종교(元宗敎)는 일제강점기 중국 동북지역에서 어느 종교 못지않게 일제에 치열하게 저항하며 독립운동과 민족교육에 앞장섰지만, 일제의 혹독한 탄압에 못 이겨 해체되고 만다. 그러나 국내에는 이들 종교가 잘 알려져 있지 않고, 심지어 민족종단에서도 그 이름조차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
◇원종교 창시자 김중건.

한국민족종교협의회(회장 한양원)는 지난해 12월 중국 연변대학에서 ‘한국민족종교운동사’의 중국어 번역사업 일환으로 학술세미나를 가졌는데, 이 자리에서 조선족 학자들의 논문을 통해 청림교와 원종교의 실체가 비교적 상세히 드러났다. 협의회 한 관계자는 “이름도 듣지 못했던 이들 종교가 항일운동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는 사실을 알고 무척 놀랍고 고무됐다”고 말했다.

허영길 조선족자치주 박물관 연구실장은 ‘청림교의 성격과 반일활동에 대하여’라는 주제의 세미나 논문에서 용정시와 화룡시 공안국 서류, 관련자들의 증언 등을 통해 청림교의 교의와 반일활동, 일제의 탄압 등을 소상히 밝혔다.

논문에 따르면 청림교는 동학의 한 갈래다. 1900년 초 동학농민봉기가 일제와 조선봉건통치세력의 잔혹한 탄압으로 실패하자 남정(호 청림)이 최수운의 동학과 당시 민중 속에 유행하던 정감록 사상을 결합해 청림교를 창교하게 된다. 훗날 단군신앙도 갖게 된다. 1904년 남정 사망 후 교세가 쇠락했지만, 2세 교주 한병수가 연길현 세린하 대구동에서 ‘야단(野團)’을 조직해 반일무장투쟁을 전개하고, 3세 교주 태두섭을 거치면서 청림교는 일제가 ‘가장 견인한 민족독립운동단체’로 경계할 정도로 부상한다.

동학의 강령 주문을 외우고 하느님을 지성껏 모시면 ‘무극대도’를 깨닫고 후천개벽을 실현해 지상낙원을 건설할 수 있다는 청림교 교의에는 일제 식민통치 하에서 압박과 착취를 받아 헐벗고 굶주리는 조선 민중의 염원이 그대로 반영돼 교세가 크게 흥성했다. 이들은 열심히 ‘멸왜기도’를 드렸고 ‘일제필망 독립필성’을 선전했다.

1919년 3·1운동을 계기로 청림교도들은 용정 3·13반일민족독립운동에 적극 참가했으며, 일제에 대항해 젊은 신도 2만명을 군사훈련시키기도 했다. 1920년 10월 청산리전투 때에는 북로군정서와 연합해 일제침략군에 타격을 가했으며 병력과 군수품을 지원했다. 이들은 또 2개의 학교를 세워 독립사상과 민족의식 고취에 나섰다.

뒤늦게 청림교의 반일행적을 파악한 일제는 1944년 12월과 1945년 5월 두 차례에 걸쳐 청림교인 검거에 들어가 120여명의 반일인사를 체포·고문했다. 이 중 16명은 비인간적 학대로 옥사하거나 석방 후 1개월도 못돼 숨졌다. 나머지도 3년에서 장기형에 이르는 혹형을 언도받았고, 절반가량은 반불구자가 돼 방면됐다.

이들은 광복 후 뭇사람의 존경을 받아야 했지만 당사자는 물론 그 후손들마저 멸시와 박해를 받았다. 좌익사상의 영향으로 ‘봉건미신’ 등의 오해를 받았기 때문인데, 허 실장은 “이는 바로잡아야 할 역사”라고 말했다.

한편 박창욱 연변대 민족연구원 교수는 ‘동학계 원종교 김중건의 교단 창립 기본정신’이라는 논문에서 원종교와 창시자 김중건에 대해 밝히고 있다.

원종교는 1912년 조선 근대의 독특한 철학가이자 사상가였던 소래 김중건(1899∼1933)에 의해 창립된다. 함남 영흥 출신으로 노장(老莊)철학을 하며 개화사상에 심취해 있던 소래는 1909년 서울에 가서 천도교에 투신해 구세구국의 진리를 모색하던 중 천도교 수령들의 사치와 일부 친일 행적에 실망한다.

이 기간에 ‘천기대경(天機大經)’을 지어 자신의 독특한 극원(極元)철학을 구사하며 구세(求世)사상인 ‘대공화(大共和) 무국(無國)론’을 편다. 특히 여기에는 억압받고 고통받는 농민을 해방하고 농촌을 개조하려는 반일 민족해방 사상이 관철돼 있다. 그가 원종교를 만든 것은 일본 헌병의 눈을 피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1920년 5월 소래는 화룡현 장인강에서 대진단을 꾸려 반일활동을 했으나, 일제의 간도대토벌 때문에 실패하자 각지에 학교를 건립해 반일 민족운동과 원종사상의 선전에 힘썼다. ‘북간도 민족종교별 조선인 학교수 및 학생수’(1926년)에 따르면 원종교는 9개 학교, 304명의 학생을 육성해 천도교나 대종교보다 학교수는 앞섰고 학생수는 둘째를 기록하고 있다.

소래는 1928년 활동무대를 연변에서 흑룡강성 영안현 팔도하자로 옮겨 ‘대공화 무국론’의 첫 단계인 농촌주의촌을 건립하고 조선 반일운동의 근거지로 삼았다. 그는 70여가구의 골간 농민을 대상으로 군대를 모집하고 무기도 사들여 반일대오를 훈련시켰으며, 동시에 항일구국군과 연계해 항일무장투쟁을 준비했으나 1933년 구국군 내 별동대에 의해 암살당한다. 뒤이어 일본 침략군이 농촌주의촌을 토벌하면서 ‘농촌주의’ 운동도 수포로 돌아간다. 소래는 1977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돼 한국의 독립운동가로 추모되고 있다.

민족종교협의회 이찬구 박사는 “일제강점기 한국 사회세력은 조선 후기 평민 지식인들이 애써 창안한 대항 이데올로기를 외면한 채 신종교를 ‘유사종교’라든가 ‘사이비종교’라며 무시하고 억압한 측면이 있다”며 “청림교와 원종교의 항일운동은 2003년 민족종교협의회에서 발행한 ‘한국민족종교운동사’에도 포함되지 않았던 새로운 사실로, 연변대에서 교재로 사용하고 있는 ‘한국민족종교운동사’에 새로 포함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정성수 종교전문기자 hulk@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