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아더를 설득한 요시다=1946년 5월 도쿄 주민들은 폐허 속에서 먹을 것조차 없어 아우성이었다. 미국의 원조를 받아 실시한 식량배급은 성인 1인당 하루 290g에 불과했다. 사람들은 생활고와 영양실조에 시달리고 거리엔 실업자들이 넘쳐났다. 도쿄 시내는 매일 수만명의 좌파 시위대가 거리를 누벼 제정 러시아의 혁명 전야처럼 불안했다. 그 무렵 신헌법 초안이 발표되고 총선거에 따라 자유진보당이 연립내각을 구성했다.
그러나 더글러스 맥아더의 미 점령군 사령부는 연립내각 수장인 하토야마 이치로(鳩山一郞)의 반미 이력을 문제삼아 총리 인준을 거부하고 공직에서 추방해버렸다. 하토야마는 대타로 외무관료 출신 요시다를 천거했고, 요시다는 즉시 내각을 구성해 총리에 올랐다. 요시다는 당시 67세로 늦깎이 정치인이었다. 요시다는 맥아더에게 매달렸다. 그는 “민주주의를 실천하려면 우선 국민을 먹여살리고 일자리를 주며 생활을 안정시키는 게 중요하다”며 식량원조를 호소했다. 깨끗한 매너와 원만한 성품의 요시다에게 호감을 갖고 있던 맥아더는 원조 요청을 받아들였다. 일본은 미국으로부터 매년 60여만t의 식량을 얻어내는 데 성공했다. 미국도 일본 정권이 좌파에 넘어갈 것을 우려해 사회안정 대책을 모색 중이던 터여서 요시다의 요청을 흔쾌히 수락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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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8년 3월 보수 정파를 규합해 민주자유당을 창당한 요시다 시게루 총리가 당 총재 연설을 하고 있다. |
요시다는 라디오 연설에서 신헌법에 천황제를 유지하면서 무력행사는 포기하고 군대를 갖지 말자는 조항을 넣자고 국민을 설득했다. 그 결과 평화헌법이 만들어졌다.
요시다의 비무장 정책은 한국전쟁에서 또다시 빛을 발한다. 1950년 한국전쟁이 터지자 미국은 일본의 재군비를 요구했으나 요시다는 이를 거부했다. 군비에 힘쓸 경우 경제를 살릴 여력이 없어진다는 이유를 댔다. 요시다는 국회 연설에서 “친미, 경무장, 경제 우선이 일본이 가야 할 길”이라고 역설했다. 일본은 미국의 핵우산 아래 매년 국민총생산(GNP)의 1% 미만을 방위비에 지출하며 경제 살리기에 집중할 수 있었다. 결국 미국은 일본을 한국전쟁 군수기지로 육성했고, 일본은 한국전쟁의 최대 수혜자가 됐다.
요시다가 전후 일본을 설계하면서 친미 보수 노선을 견지한 배경에는 사회 혼란이라는 위기 상황이 있었다. 그는 먹고살 게 없는 전후 혼란이 좌파 혁명으로 비화하는 것을 가장 두려워했다. 당시는 공산주의 혁명이 소련 지원 하에 전 세계를 휩쓸던 시대였다. 그래서 요시다는 군부세력을 배후로 하는 극우세력과 급진 좌파세력을 정부 요직에서 배제했다. 이는 자민당이라는 안정 지향의 보수 정치세력이 등장하는 주요인이 된다.
◆후계자 양성으로 미래 대비=요시다를 평가할 때 빼놓을 수 없는 것은 인재를 키우고 배치하는 능력이다. “정치가란 공부할 여유가 없다. 따라서 국가정책은 전문 관료에게 맡겨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그는 인사에서는 절대 권력에 가까운 권한을 휘둘렀다. ‘원맨 재상’ ‘관료체제의 원조’라는 달갑지 않은 별명도 얻었다. 그가 실무 능력을 갖춘 관료를 중용한 배경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무엇보다 국가 재건 과정에서 ‘능력있는 실무자’들이 필요했고, 요시다 개인으로서는 허약한 정치기반을 다지기 위해 말 잘 듣는 관료들을 원했다. 그는 심지어 자신을 천거해준 정계 실력자 하토야마에게까지 인사권에 간섭하지 말 것을 요구했다. 과감한 인재 등용을 펼칠 수 있는 여건을 만든 것이다.
요시다에 이어 총리에 오른 이케다 하야토(池田勇人),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 다나카 가쿠에이(田中角榮), 미키 다케오(三木武夫) 등은 ‘요시다 학교’의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요시다는 정치문하생들을 측근에 배치해놓고 국가 경영을 익히게 했다. 자신이 설정한 국가적 좌표가 중단없이 실천돼야 한다는 당부도 빼놓지 않았다. 이들은 요시다에 이어 차례로 총리를 지내면서 1960∼80년대 경제호황기를 일궈내 일본을 미국 다음의 부자 나라로 만들었다.
도쿄=정승욱 특파원
■요시다 시게루 약력
1878년 다케우치 쓰나 전 중의원 의원의 5남으로 도쿄 출생
1881년 요코하마의 무역상 요시다 겐조의 양자로 입적
1906년 도쿄대 법학부 졸업. 외교관으로 발탁
1928년 외무차관 취임. 이후 주중 대사, 주이탈리아 대사, 주영 대사 역임
1939년 2차대전 직전 일·독·이 삼국 동맹에 반대. 직위 박탈당하고 사직
1941년 태평양전쟁 반대. 반역죄로 실형 선고받고 수감
1945년 패전 후 첫 외상 취임
1946년 패전 후 첫 총리 취임. 평화헌법 공포
1950년 한국전쟁 발발. 미국의 재군비 요구 거절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미일안보동맹 체결
1954년 총리 사직. 5차 내각까지 최장수 총리 재임 기록
1967년 89세 일기로 사망
1878년 다케우치 쓰나 전 중의원 의원의 5남으로 도쿄 출생
1881년 요코하마의 무역상 요시다 겐조의 양자로 입적
1906년 도쿄대 법학부 졸업. 외교관으로 발탁
1928년 외무차관 취임. 이후 주중 대사, 주이탈리아 대사, 주영 대사 역임
1939년 2차대전 직전 일·독·이 삼국 동맹에 반대. 직위 박탈당하고 사직
1941년 태평양전쟁 반대. 반역죄로 실형 선고받고 수감
1945년 패전 후 첫 외상 취임
1946년 패전 후 첫 총리 취임. 평화헌법 공포
1950년 한국전쟁 발발. 미국의 재군비 요구 거절
1951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미일안보동맹 체결
1954년 총리 사직. 5차 내각까지 최장수 총리 재임 기록
1967년 89세 일기로 사망
■요시다의 공과
일본의 정치학자들은 전후 국제 상황을 적절히 활용하면서 국익에 보탬을 준 인물로 요시다 시게루(吉田茂) 전 총리를 주저없이 꼽는다. 그러나 그에 대한 부정적 평가도 적지 않다. 요시다는 일제가 저지른 전쟁 범죄를 소홀히 다룸으로써 선진국들의 비난 거리를 제공하게 된다. 또 관료들에게 지나치게 의존한 나머지 관료 우선 사회가 되도록 했다는 지적도 받는다. 이런 점들은 일본이 세계사에서 유례없는 경제 기적을 이뤘지만 그 의미를 반감시키는 결과를 초래한다.
그는 열렬한 국왕 숭배자였으며 ‘일본 우월관’을 지닌 인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저서 ‘세계와 일본’에서 “당시 일본이 재무장하는 것은 경제적·사상적·사회적으로 불가능했다. 그러나 국가 안보를 언제까지나 외국에 의존해야 한다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고 썼다. 일본이 재무장해야 한다는 논리를 우회적으로 피력한 것으로, 여느 일본 정치인과 마찬가지로 미흡한 역사인식이 그대로 드러나 있다.
요시다는 국가 재건이라는 명분 아래 관료들을 중용했으나 이는 관료주의 폐해를 낳게 된다. 관료 지상주의는 1980년대 말부터 비능률, 현실 안주 등으로 나타나면서 일본 경제에 부담으로 작용했다. 이는 1990년대 초반부터 10여년간 일본 경제를 침체의 늪으로 밀어넣는 근본 원인으로 지적된다. 지금도 일본 사회 곳곳에서 관료들의 우월한 사회적 지위가 눈에 띈다.
요시다는 한국과 좋지 않은 인연을 맺었다. 일본 국익을 위한 정치행위가 한국에는 고통과 멍에를 안겨줬다. 기밀해제된 미국 외교문서에 따르면 요시다는 1949년 전후 처리를 위해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초안을 작성한 미 국무부 고문 존 포스터 덜레스에게 한국에 대한 전승국 지위 부여에 항변했다. 그는 일본에 거주하는 재일한국인들을 ‘빨갱이’로 규정하면서 이들이 폭동을 일으키면 일본이 결딴날 것처럼 말했다. 나중에 한국에 물게 될 엄청난 전쟁 보상을 미연에 방지하려는 속셈이다. 결국 1951년 9월 조인된 대일 강화조약에서 한국은 전승국 대열에서 탈락하고 만다.
도쿄=정승욱 특파원 jswook@segye.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