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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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英 등 부작용 몰라 카지노 육성하겠나”

조기송 강원랜드 대표이사
헤어진 여자가 내게로 와 속삭였다. “카지노로 가자!”

조기송 강원랜드 대표이사와의 인터뷰를 앞두고 머릿속을 맴돌았던 문구다(작년도 세계문학상 수상작 ‘슬롯’의 카피). 카피가 인상 깊었기도 했지만 통상 카지노에 대한 인식이란 게 이 책에서 묘사된 것처럼 도박, 그리고 술과 여자가 빠지지 않는다.

지난 23일 서울 역삼동 하이원리조트 서울사무소에서 만난 조기송 대표는 탈(脫)카지노를 꿈꾸고 있었다. 물론 카지노가 풍기는 도박 이미지를 털어내려는 것이었을 뿐 카지노 산업의 중요성을 간과한 채 관광산업을 강조하는 분위기엔 누구보다 안타까워했다. 하지만 현실을 감안한 듯 카지노가 아닌 이미 다른 성장동력 발굴에 고심하고 있었다.

◆LG맨에서 강원랜드 CEO까지=조 대표는 LG전자에서 약 27년을 근무한 LG맨이다. 2004년부터는 중국 TLC집단(그룹)의 전자계열사 수석운영관으로 근무한 전자통이기도 하다. 카지노와는 전혀 인연이 없다. 조 대표가 관광산업에 주목하게 된 것은 중국 정부 관리들을 만나면서부터다. “중국 관리들은 2015년이면 해외여행을 떠나는 자국민들이 3억명에 달할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관광지 개발에 열을 올리고 있습니다. 국부 유출을 막겠다는 거예요.” 중국 본토에서 1시간 거리도 안 되는 마카오는 관광산업의 저력을 느끼기에 충분했다. 마침 낙하산 인사로 홍역을 앓던 강원랜드가 CEO(최고경영자)를 공모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조 대표의 고향은 강원도 강릉. 정부가 폐광촌 활성화를 위해 만든 레저단지가 ‘노름판’으로 전락하는 모습도 가슴 아팠다.

조 대표는 2006년 3월 취임 이후 강원랜드를 180도 바꿔놨다. 취임과 함께 비상경영을 선포하고 혁신 드라이브를 걸었다. 독점에 안주하던 공기업적 한계와 각종 비리 및 파벌 간 암투 등을 없애고 효율과 성과를 중시하는 민간기업 DNA를 심는 데 주력했다. 카지노 업체에서 가족 리조트로 거듭나기 위한 노력도 병행했다. 작년 6월에는 새 CI(기업이미지)인 ‘하이원리조트’(High1 Resort)를 선포했다. 하이원리조트 브랜드를 길러 도박장 이미지가 굳어진 강원랜드를 종속 브랜드화하겠다는 전략이다.

하이원리조트는 지난해 사상 최고 실적을 기록했다. 공시 전이라 구체적 수치를 밝힐 수는 없다고 했지만, 매출 1조원과 영업이익 4000억원을 각각 상회할 것이 확실시된다. 작년 전체 내장객수는 약 340만명. 제주도를 방문하는 연인원이 450만명이란 점을 감안하면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가족단위 관광객도 2003년 연간 23만명에서 지난해 88만명 수준으로 늘었다. 조 대표는 “2015년이면 지금보다 매출은 2배, 카지노와 문화관광 부문의 매출이 5대 5로 같아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관광산업의 꽃은 카지노=“우리나라 무역수지 흑자가 160억달러 정도 됩니다. 온 나라가 뒤집어져서 낸 흑자가 그것인데, 관광수지 적자가 100억달러를 넘어요. “조 대표는 우리 관광산업이 암울한 상황임을 거듭 강조했다. 주변 국가들과 달리 외국인들을 찾아볼 수 없는 서울은 국제도시가 아니라고도 했다. 그는 “싱가포르, 일본, 미국, 영국, 호주, 캐나다, 중국 등이 도박중독자가 생기는 것을 몰라서 카지노를 육성하고 있는 게 아니다”며 “내국인 전용이든 외국인 전용이든 카지노 정책을 이렇게 해서는 관광산업이 뒤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카지노는 집객력이 높은 업종이다. 인구 50만명인 마카오에는 지난해 관광객 2400만명이 다녀갔다. 유교적 분위기가 엄격한 싱가포르조차도 초대형 카지노 두 개 단지를 짓고 있다. 리콴유(李光耀) 전 총리는 “관광객이 900만∼950만명에서 정체 상태다. 카지노를 가지면 적어도 1700만명이 넘어간다. 카지노를 좋아하지 않지만 안 할 수 없다”고 토로한 바 있다.

조 대표는 최소한 사업가 측면에선 국내 카지노의 성장 가능성을 제쳐놨다. ‘카지노=도박=패가망신’으로 이어지는 사회적 인식이 바뀌기 어렵고, 관광을 죄악시하던 시절 만들어진 법들이 살아 있기 때문이다. “게임 테이블 수를 늘리는 것은 고사하고, 옮기는 것도 허가받아야 합니다.” 명문화된 규제는 규제의 일부에 불과하다는 게 기업하는 사람들의 흔한 표현이다. 길을 열어놨어도 조건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 많고, ‘○○과 상의한다’는 구절이라도 있을라치면 적용은 고무줄이다. 조 대표는 2006년 ‘바다이야기’ 파문 이후에야 ‘사행산업통합감독위원회’가 출범하게 된 과정에도 큰 아쉬움을 표했다. 규제 일변도로 흘러갈 수밖에 없는 구조란 설명이다.

◆게임과 해외 진출이 돌파구=“장사치가 시장 찾아가는 것은 당연하지요. 국내에는 시장이 없습니다.” 조 대표는 “카지노 자본들이 동양으로 몰려오고 있다”며 “선점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밝혔다. 조 대표는 “구체적인 얘기가 진행된 몇 곳을 상대로 본격적인 사업성 검토에 착수하려는 단계”라며 “장기적으로 3∼4곳은 진출하고, 크루즈 사업도 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콘솔게임(비디오게임)의 경우 진척이 꽤 됐다. 국내에선 온라인 게임이 인기지만, 포화 상태인 데다 세계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콘솔게임이 더 크다. 하이원의 구상은 게임사업 진출을 노리는 해외업체와 손잡고 게임타이틀(콘텐츠) 개발에 나선다는 것. 조 대표는 “20세기폭스, 파라마운트, 버진 등과 논의 중”이라며 “8월이면 합작회사가 출범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임대료가 비싸기로 소문난 스타타워에 입주해 있는 것도 결국은 게임사업 진출을 위한 측면이 있다. 물론 회사 안팎의 반대도 많다. 조 대표는 “우리가 게임에 진출해선 안 되는 이유를 당장 10가지라도 댈 수 있다”면서 “하지만, 첨단산업과 맞물려야 비약적인 발전이 가능하지 호텔, 골프장만 짓고 있어서는 곤란하다”고 강조했다.

조현일 기자 conan@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