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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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은의 길에서 만난 사람] <13> 중국 루구호

◇루구호에서 말을 몰고 배를 타는 일은 모두 여자가 한다.
여인들의 마을이라…. 중국 여행을 떠나며 가장 가 보고 싶었던 곳으로 향하는 마음은 두 근 반 세 근 반 뛰기 시작했다. 루구호(瀘沽湖)는 ‘어머니의 호수’란 뜻으로, 이곳 사람들은 호수를 둘러싼 몇 개의 마을에 흩어져 살며 독특한 모계사회 전통을 갖고 있다.

버스는 루구호에서 가장 큰 마을인 루수이(洛水)의 어떤 집 마당에 섰다. 호객을 위해 집주인의 딸인 듯한 두 사람이 쭈뼛쭈뼛 나와 말을 거는데, 저편에 엄마인 듯한 사람이 빨래를 널고 있다.

‘와, 집에 여자들만 있잖아?’ 괜한 설렘에 미소가 지어졌다. ‘당연히 모쒀족(摩梭族) 여인들과 지낼 수 있는 이곳에 묵어야지!’

좀 전에 말을 걸어온 서우핑은 대학생이다. 학교는 다른 도시에서 다니는데 방학 동안 엄마를 도와 일하고 있다고 했다.

책으로만 보던 모계사회의 삶을 직접 체험하니 궁금한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서우핑을 졸졸 쫓아다니며 묻기 시작했다. 먼저, 가볍게 가족 내 권력관계부터 질문해 봤다.
◇루구호 전경

“우리 집은 할머니가 돌아가셔서 이제 엄마가 중요한 의사를 결정해요.” 서우핑네 집엔 아들이 없지만 다른 집도 다 그런단다. 서우핑네 집은 엄마와 두 딸이 전부다. 

루구호에서는 집안의 의사결정뿐 아니라 경제활동 등 모든 것이 여자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짐을 풀고 호숫가로 나가 보니 관광객들에게 말을 태워주는 사람도 여자고, 배를 태워 주는 사공도 여자다. 가족의 생계 걱정도 여자들이 한다.

첩첩산중이어서 조용히 그들만의 전통을 유지하며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젠 관광지가 되어버려 마을 주민 대부분이 관광업에 종사하는 것 같았다. 길거리 서점에서는 이곳 출신 미모의 여자가 미국 남자와 결혼해 미국으로 건너갔으나 이혼했다는 내용의 책이 팔리고 있었다. 
◇전통의상을 입은 모쒀족 여인들. 원색의 옷이 아름답다.

밤이 되어 심심하던 참에 서우핑이 모쒀족 전통 공연을 보러 가란다. 공연장은 관광객들로 가득 차 있었다. 낮 동안 보지 못했던 모쒀족 남자들 역시 모두 이곳에 있었다. 드디어 남자 구경이라니 신난다. 남자들이 불을 피우고 피리를 불며 흥을 돋우고, 곧이어 전통의상으로 단장한 모쒀족 여자들이 무리 지어 들어온다. 남자들이 노래를 부르면, 여자들이 간드러진 목소리로 답가를 하며 공연 분위기는 무르익어갔다. 서우핑에게 물으니 이런 자리에서 눈맞은 모쒀족 남녀가 연애를 한단다.

모쒀족에게는 결혼이라는 제도 자체가 없고, ‘쩌우훈(走婚)’이라는 독특한 관습이 있다. 마음에 드는 남자와 잠자리를 하고 아이는 여자가 낳아 키운다. 그렇다고 오해 말라. 아이를 낳고 싶을 만큼 사랑하는 남자의 아이를 갖는 것이니.

평생 한 사람과 관계를 맺기도 하지만, 보통은 3∼4명과 관계한다고 한다. 낳은 아이는 어머니와 함께 살고, 아이 아빠는 여자 집에 와서 잠을 자고 가거나 아이를 만나러 올 수 있다고 한다. 남녀 관계는 밤에 여자가 방문을 열어줄 때까지, 또는 남자가 찾아올 때까지 계속된다고 한다.

서우핑네 집 식구들과 함께 밥을 먹은 적이 있는데, 나이 든 한 남자가 저녁식사 때 왔다. 그는 식구들과 맛있게 밥을 먹고 TV를 보더니 잠잘 시간이 되자 아줌마와 서우핑, 동생에게 손을 흔들고 자전거를 타고 사라졌다.

누구냐고 물으니 아빠란다. “뭐라고? 아빠?” 아빠는 아빠의 엄마 집에서 산단다. 이곳 남자들은 평생 자신을 낳아준 엄마와 함께 산다니 정말 신기하다.
◇필자와 서우핑, 그의 동생이 함께 사진을 찍었다.

서우핑, 동생과 친해져 ‘노자(안녕∼)’, ‘아미지’(감자), ‘하즈’(먹다) 같은 모쒀족어도 배우고 함께 호수 구경도 다녔다. 마을을 돌아다니며 서우핑 또래의 남자들도 만나봤는데, 단지 엄마의 성을 따르고 아빠와 같이 살지 않을 뿐 삶의 모습은 우리 사회와 똑같았다. 어쩌면 결혼과 이혼이라는 제도의 관습에 묶인 우리 사회보다 훨씬 더 평화롭고 자연스러워 보였다.

어느 날 저녁 서우핑에게 웃으며 마지막으로 물었다. “서우핑, 넌 엄마의 남자들이 몇 명이었는지 알아?”라는 질문에 서우핑이 뭔가 알고 있는 듯 필자의 귀에 몸을 기울이며 다가왔다. 그러곤, 조용히 속삭였다. “몰라…”라고 말이다. 하하하. 남의 연애사에는 관심을 갖지 말아야겠다.

# 루구호(瀘沽湖)

루구호는 윈난성과 쓰촨성의 경계를 이루는 해발 2690m에 자리하고 있다. 모계사회의 전통을 간직하는 모쒀족이 사는 마을이다. 중국 정부는 이들이 모계사회 전통을 지닌 나시족(納西族)의 지계로 지정했지만, 최근 이들의 DNA 분석에서 티베트족 후손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험준한 산으로 둘러싸인 호수 주변에 위치해 모계사회 전통을 이어올 수 있었지만, ‘동방의 여인국’으로 각광받으며 현재는 많은 관광객들이 찾고 있다. 덕분에 마을 사람들 대부분이 관광업에 종사하면서 개발과 문화 파괴 현상이 진행되고 있다.

# 여행정보

루구호로 가려면 먼저 대한항공이나 중국 둥팡항공을 이용해 쿤밍(昆明)으로 들어가야 한다. 이후 기차나 버스를 타고 리장(麗江)으로 간 후 리장에서 다시 버스를 타고 루구호로 들어간다. 쿤밍에서 야간버스를 타고 링랑으로 간 후 링랑에서 다시 버스를 타고 가는 방법도 있다. 버스비는 60∼70원(1원은 약 140원)이고, 7∼8시간 소요된다. 가는 길이 그리 좋지 않아 멀미하는 사람은 대비해야 한다. 루구호에 들어가기 전, 산으로 둘러싸인 호수의 전망을 볼 수 있는 곳에서 사진을 찍을 수 있도록 20분 정도 차를 세워준다. 그 경치가 환상적이다.

호수 주변의 마을로는 가장 번화한 루수이, 리거(理格), 융닝(永寧), 그리고 관광객들이 드문 다쭈이(大嘴) 등이 있다. 지리적으로는 외진 곳이지만 관광지로 개발되어 식당, 숙박, 놀거리 등이 잘 갖춰져 있고 여행 중 불편함은 없다. 숙박시설의 가격대도 다양하다. 모쒀족 여인이 끄는 말을 타거나 노 젓는 배를 타고 섬을 돌아볼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