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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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훈 "난 영원한 한국인…한·중·일 통합리그 만드는데 주력"

‘일본 프로야구의 살아 있는 영웅.’

장훈(張勳·일본명 하리모토 이사오·68)은 한국인이지만 일본 야구인들은 그를 영웅이라고 부르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1976년 3월 장훈은 일본 프로야구의 명가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유니폼을 입고 경기장에 나섰다. 지난해 재팬시리즈 타이틀을 거머쥔 강호 니혼햄의 전신 ‘도에이 플라이어스’에서 7차례나 수위타자 자리에 오른 장훈이 요미우리의 4번 타자로 영입돼 새 둥지를 튼 것이다. 이는 당시 요미우리의 4번 타자였던 나가시마 시게오 현 요미우리 종신명예감독이 은퇴하면서 장훈을 후계자로 지명해 이뤄졌다.

그는 홈런왕 왕정치(일본명 오 사다하루)와 함께 ‘OH’포를 형성하면서 시즌 내내 뜨거운 방망이를 휘두른다. 요미우리 연속 우승의 시작은 장훈의 타격에서 비롯되었다는 게 요미우리 홍보실의 평가다.

장훈은 지금도 깨지지 않는 3085개 안타 등 숱한 기록을 양산했지만 프로야구 감독은 하지 못했다. 위대한 선수가 위대한 감독으로 이어지지 못한 것이다. 야구 전문가들은 그 원인을 장훈의 ‘강한 개성’, ‘직언을 서슴지 않는 직선적인 성격’ 등에서 찾고 있지만, 일본 땅에서 재일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제대로 대접받지 못했던 시대 상황 때문이라는 분석이 더 설득력이 있다.

장훈을 대하는 일본 야구인들의 태도는 다르다. 일본 프로야구의 전설로 통하는 나가시마 감독이나 대만 출신 홈런왕 왕정치 소프트뱅크 호크스 감독은 장훈이란 이름 석 자 앞에서는 항상 존경을 표한다. 이들은 장훈을 야구 선수로서의 덕목을 갖춘 인격자로 대했다. 끝까지 한국인으로 운동장에 나섰다는 ‘옹고집’ 때문만이 아니다. 이들은 재일 한국인으로서 어쩔 수 없는 멸시와 홀대를 감내하면서 한계상황에서도 자신의 분기를 삭일 줄 아는 인내와 끈기에 경의를 표했다.

장훈은 나가시마 감독을 선배로 깍듯이 대했고, 수위타자 경쟁 상대였던 왕정치 감독과도 동갑내기 친구로 허물없이 대했다고 야구인들은 말한다. 그는 선수 시절 내내 한국인임을 자랑스럽게 내세우면서 국적 때문에 차별당하는 기색이 있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강하게 반항했다. 그러면서도 야구인으로서 지켜야 할 도리를 초지일관 유지했다. 그는 다소 지나칠 정도로 한국인임을 내세워 ‘빗나간 야구 영웅’이란 비아냥도 들어야 했다.

지난 22일 도쿄 시내 아카사카의 찻집에서 만난 장훈은 가슴에 묻어둔 어린 시절 얘기를 털어놨다.

“어릴 적이라 기억이 희미합니다. 어머니의 말을 통해 기억을 더듬어보면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기 1년 전인 네 살 때 한국에서 부친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당시 일본에서 멸시받고 살 바에는 차라리 한국으로 돌아가는 게 낫다고 해서 부친은 일가족을 한국으로 이주시키는 준비를 하셨던 것 같습니다. 어머니는 나와 형제들을 데리고 히로시마의 시로노메 항구에 나갔습니다. 한국으로 귀향하는 교포들 틈에 끼어 뱃머리에서 차례로 줄을 섰습니다. 그러던 중 우리 식구들 앞에서 세 번째 사람부터 승선이 중단됐습니다. 정원이 찼다는 겁니다. 실망했지만 그것이 생사를 갈라놓은 사건이 될 줄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습니다.”

귀국길에 오른 교포들을 부산이나 거제 등지로 실어나르던 그 배는 70명 정도가 타는 소형 선박이었는데, 한국으로 가던 중 배가 침몰해 모두 죽었다는 소식이 들려온 것이다. 그는 이어 “어머니는 침몰했던 배가 그전에 한국에 세 번 정도 오갔다는 말에 안심하고 승선하려 했던 모양”이라며 “나는 어릴 적 두 번 죽음의 위기를 넘겼는데 첫 번째가 이 귀국선 침몰사건”이라고 설명했다. 장훈은 녹차를 들이켠 뒤 죽음을 넘긴 두 번째 이야기를 들려줬다.

“두 번째 위기는 히로시마 원자폭탄 투하 당시였습니다. 당시 히로시마 시내 단바라신마치(段原新町) 지역의 4평 반 정도 되는 다다미방에서 어머니 등 다섯 식구가 살고 있었습니다. 폭발 장소는 우리가 사는 지역에서 2㎞ 정도 떨어진 곳이었습니다. 동네 뒤쪽에 100m 높이의 히지야마라는 야트막한 산이 있었는데 야산 뒤쪽에서 원폭이 폭발하는 바람에 그쪽 주민들은 모두 사망했지만 우리 동네는 열선이 뻗치지 않아 큰 화를 입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언제 건강에 이상이 올지 몰라 항상 불안했습니다.”

그는 “다섯 살 때였으니 제대로 기억할 수는 없지만 어머니의 얘기를 토대로 더듬어보면 그랬다”며 말을 이어갔다.

“폭발 직후 얼마쯤 지났을까, 거센 열풍이 휘몰아치면서 집 지붕이 날아가 버리자 강아지처럼 옹기종기 모여 있던 우리를 어머니가 감싸안아 다행히 큰 상처를 입지 않았습니다. 어머니는 유리조각 등 파편이 등에 박혀 훗날 고생하셨죠. 폭발 직후 어머니는 경상도사투리로 ‘빨리 포도밭으로 내빼라’라고 소리지르셨고, 나는 작은누님과 형을 따라 50m 정도 떨어진 포도밭으로 죽을 힘을 다해 뛰어갔습니다. 열 살 위였던 큰누님은 폭발 당시 히지야마 언덕에서 부역에 동원됐다가 참변을 당했습니다. 당시 전쟁 부역에 나갔던 사람은 아무도 돌아오지 못했는데 그때 원폭으로 사망한 것으로 기억합니다.”

장훈은 한국인이라는 사실을 항상 잊지 않고 사는 데는 어머니의 영향이 컸다고 말했다. 그는 어머니가 일본 땅에 사는 재일 한국인 자녀의 현실을 이해하면서 자신을 채찍질한 강한 여자였다고 회고했다.

“나는 다른 친구들에 비해 키(183㎝)와 덩치가 커서 패싸움에 쉽게 말려들었습니다. 초등학교 5학년 때였을까, 한국 학생의 입에 슬리퍼를 물리고 돼지 흉내를 내라고 한 일본 학생들을 흠씬 때려줬습니다. 다른 일본 아이들이 몰려와 나를 집단 구타해 분해서 운 적이 있습니다.”

그때 학교 측에서는 그의 어머니에게 자식을 제대로 지도하라고 말했지만 집에 돌아온 어머니는 오히려 “한국인은 우수하고 용감하며 성실한 민족”이라고 자랑했다. 어머니는 또 “한국인은 인구가 적고 신식무기가 없어서 어려움을 당하고 있지만 훌륭한 민족임은 틀림없다. 너무 억울해하지 마라”라며 오히려 장훈을 북돋워줬다. 장훈은 야구 얘기로 화제를 돌렸다. 야구 얘기가 나오자 상기된 표정으로 그는 굵은 팔뚝을 내보였다. 손바닥에는 굳은살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초등학교 5학년 때 동네 야구팀에서 투수를 맡았는데 잘한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중학교에 진학한 이후 야구부에 들어갔습니다. 어머니는 중학교를 졸업하고 택시기사가 되라며 야구하는 것을 반대하셨습니다. 어머니 혼자서 세 자녀를 키우기가 벅차 생계에 보탬이 되라는 뜻에서 그러신 것 같습니다. 야구선수로 인생 행로를 잡은 이후 너무 고생스러워 후회도 많이 했습니다. 좋아하는 것을 마음대로 먹고 재일교포 가수 미소라 히바리의 공연도 공짜로 보는 것이 부러워서 깡패가 돼볼까도 생각했습니다. 철없던 시절이었지….”

장훈은 “형 정열씨의 헌신과 우애가 없었다면 오늘의 장훈은 존재하지 않았다”면서 형 얘기를 꺼냈다.

“형은 택시를 운전하면서 당시 한 달에 2만3000엔(지금의 30만엔 수준)을 벌어 1만엔을 나에게 송금했습니다. 1만3000엔으로 네 식구가 살았으니 오죽했겠습니까. 남들은 새 야구용품을 샀지만 나는 형이 보내준 중고 야구용품으로도 기뻤습니다. 한 달 하숙비로 5000엔을 내고 5000엔으로 생활을 했는데 이용료 30엔인 목욕탕에도 가지 못했습니다. 그때 좀더 잘 먹었다면 더 좋은 기록을 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나니와상고에서 4번 타자를 맡았으나 프로선수 등용문인 ‘고시엔 대회’에는 한국인이라는 이유로 한 번도 나가지 못했습니다. 다른 야구선수들이 ‘조센징’이 고시엔 대회에 나가면 대회가 더러워진다고 놀려대는 바람에 술 마시고 밤새 울어본 적도 있습니다.”

장훈은 “당신이 만일 감수성이 예민한 시절 그런 얘기를 들었다면 어떻게 견뎠겠느냐”고 반문하면서 “그래도 어머니는 귀화를 거부했다”고 말했다.

“나니와상고를 졸업한 뒤 곧바로 프로리그의 중간 수준 팀이었던 도에이 플라이어스에 스카우트됐습니다. 강팀인 나고야 주니치 드래건스의 연봉 600만엔 제의를 거절하고 연봉 200만엔을 제시한 도에이팀을 선택했습니다. 편하게 경기에 나설 수 있다는 장점도 있었지만 구단주가 어머니 앞에 무릎 꿇고 간청한 것에 마음이 끌렸습니다. 한창 주가를 올릴 즈음 구단주가 나보고 감독을 시켜 줄 테니 귀화하라고 세 번이나 종용해 갈등이 많았습니다. 그때마다 어머니는 ‘그딴 것 하려고 야구 하냐. 히로시마로 돌아와라. 나라가 중요하냐, 감독이 중요하냐’며 호통을 치시곤 했죠. 그 바람에 결국 귀화를 포기했는데 이후에도 한국 국적이었기 때문에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그런 어려움은 장훈 당대에 끝난 것도 아니다. 그는 “지금 대학에 다니는 그의 딸도 중학 시절 일본 친구들이 한국인이라고 따돌린다며 울곤 했다”며 “일본에서 나고 자랐으면서 한국인으로 살아야 하는 자신의 정체성에 관해 고민하는 것 같았다”고 말했다. 그는 “그때 딸에게 역도산에 관한 얘기를 해주며 설득했고, 지금은 한국인임을 자랑스럽게 여기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일본 프로레슬링 선수로 전설처럼 살다 야쿠자의 칼을 맞고 숨진 역도산에 대해 얘기할 때 장훈의 목소리가 커졌다.

“원래 역도산은 술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일본에서 활동하는 재일교포 출신 연예인이나 운동선수들을 자주 요정에 불러 식사 대접을 하고 함께 노래를 부르곤 했습니다. 당시 요정에는 일본인 직원들이 있었는데, 그들을 모두 내보내고 안에서 문을 잠근 뒤 노래를 부르며 밤을 지새우곤 했습니다.”

장훈은 화상으로 왼손 새끼손가락이 반이나 잘려나간 장애인이다. 하지만 선수 시절 매일 밤 불을 끈 채 2000번 이상 스윙 연습을 해 그 결함을 극복했다. TV에 출연해 야구해설자로, 스포츠계 명사로 활약하는 그는 “미국 메이저리그에 선수를 빼앗기지 않기 위해서라도 한국, 일본, 대만, 중국을 포함한 통합 프로리그를 만드는 데 생애를 바치겠다”며 의욕을 보였다.

도쿄=정승욱 특파원



◆장훈 프로필

▲1940년 일본 히로시마시에서 출생

▲1959년 오사카 나니와상고 졸업

▲1959년 도에이 플라이어스 입단, 신인왕

▲1976년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

▲1980년 롯데 오리온스로 이적

▲1981년 현역 은퇴

▲1982년 이후 야구 해설자로 활동

▲1990년 야구의 전당 입성

◆장훈의 프로야구 통산 기록

안타 3085개 (역대 1위)

출장 2752경기 ( 역대 3위)

타율 0.31915 (역대 3위)

홈런 504개 (역대 7위)

타점 1676 (역대 4위)

도루 319 (역대 20위)

사구 1274개 (역대 3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