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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순원 소설가 |
때로는 그 계절의 기후보다 그 계절을 나타내는 말 자체를 더 좋아할 때가 있다. 내게는 바로 요즘 시기의 ‘맥추(麥秋) 무렵’이라는 말이 그러한데, 이건 순전히 어린 시절부터 바라보면서 자란 잘 익은 보리밭의 풍경 때문이다. 글자 그대로 풀이하면 보릿가을인데, 진짜 가을은 아니고 보리가 익는 계절이니까 바로 요즘을 그렇게 불렀다.
가을에 보리를 파종하고, 싹이 자라면 이내 서리가 내린다. 그러면 서리가 땅 껍질을 들어올릴 때 보리 뿌리가 함께 뽑혀 올라와 얼지 말라고 온 식구가 나가 보리밟기를 했다. 그런 보리가 봄이 되어 다시 파릇파릇 잔디처럼 자라 바다와 같은 평원을 이루고, 그것이 바로 지금 누렇게 익는 것이다.
같은 여름도 초여름과 한여름과 늦여름을 나누듯 어린 시절 어른들은 같은 초여름 날씨도 말 그대로 보리가 익는 ‘맥추 무렵’과 보리가 익은 다음의 ‘맥추 이후’를 구분해 썼다. 같은 뜻의 말이라 하더라도 할아버지는 맥추보다 ‘맥량(麥凉)’이라는 말을 더 즐겨 썼는데, 그것은 보리가 익을 무렵의 날씨가 봄과 여름의 한중간이면서도 또 가을처럼 서늘한 맛이 있다고 했다. 5월 중순에 한창 더울 때는 한여름처럼 덥다가 또 어느 며칠 가을처럼 서늘한 느낌이 들어 이런 날은 짧은 소매보다 긴 소매 옷을 입고 나가야 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드는 시기가 바로 맥량인 요즘이다.
그러나 나는 우리 어린 시절 세상 이치의 스승이었던 할아버지만큼 자연과 내 몸을 일치시키지 못해 아직 밀과 보리가 익는 맥량의 서늘함을 제대로 느껴본 적이 없다. 그냥 맥추와 맥량이란 말 속에 담겨 있는 상징적 의미를 좋아하는 것이다.
예전에는 어느 동네를 가더라도 지금 철엔 그 동네 밭의 절반가량은 보리밭이거나 밀밭이었다. 쌀과 함께 보리가 주곡이었던 시절의 일이겠지만, 지금은 주변에 보리밭 구경을 하기 어려워졌다. 이따금 신문이나 인터넷에서 보게 되는 보리밭 풍경이 오랜 기억 속에 익숙한 그 풍경이 아니라 오히려 이국적일 만큼 낯설고 신선하게 느껴지는 것이다.
예전엔 나라에서도 정책적으로 혼분식을 장려했다. 점심시간이면 선생님이 맨 쌀밥으로만 도시락을 싸왔는지, 아니면 보리쌀을 섞은 밥인지 검사를 했던 것이다. 아이들 도시락에 보리쌀을 섞으면 집에서 식구들이 먹는 밥에도 당연히 보리쌀을 섞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쌀이 귀하던 시절의 이야기다. 면 단위마다 하나씩 있던 동네 양조장의 막걸리도 쌀로 술을 빚지 못하게 하고 옥수수 가루로 빚게 했다. 곳간에도 쌀 가마니와 보리쌀 가마니가 함께 있었다.
그런 보리쌀이 이젠 어디에서든 보기 귀하게 되었다. 일부러 보리밥집을 가야지만 구경할 수 있다. 사료용 말고 식용으로 씨를 뿌린 보리밭은 더욱 보기 어려운 시절이다. 그래서 어디에 넓은 보리밭이 있다고 하면 일부러 시간을 내 구경을 떠나기도 한다. 아직 익지 않은 푸른 보리밭에 한줄기 바람이 불고 지나가면, 바람 자리를 따라 이제 막 패기 시작한 이삭들이 서로 얼굴을 부딪치며 물결처럼 나부끼는 풍경을 눈에 담고 오는 것이다.
어릴 때는 그게 바람의 모습처럼 보였다. 바람이 우리 눈에 보인다고 생각했던 것도 산등성이의 넓은 보리밭과 밀밭을 바라보면서였다. 논바닥을 훑고 지나가는 바람보다 밀과 보리 대공을 흔들고 지나가는 바람이 저 멀리서도 내 얼굴을 쓰다듬는 것 같았다. 바로 그 바람의 마중을 떠나는 것이다. 계절이 우리 삶을 스쳐 지나가는 길목은 알고 살아야겠다는 생각이다.
이순원 소설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