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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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병주의 역사에서 길을 찾다] 조선 역사의 흐름을 바꾼 ‘계유정난’

◇경남 합천 해인사에 보관돼 있는 조선 제7대 임금 세조의 전신 화상(가운데 인물). 즉위 4년인 1458년 제작됐다.
지금으로부터 정확하게 555년 전인 1453년 10월10일. 조선 역사의 흐름을 바꾼 대사건이 일어났다. 바로 수양대군이 주도하여 일으킨 쿠데타, 계유정난(癸酉靖難)이 그것이다. 계유정난을 풀이하면 계유년에 일어난 ‘어려움을 평정한 사건’이다. 1453년 10월10일 그날 무슨 일이 일어났던 것일까?

#1. 단종의 즉위와 신권의 부상

세종의 사망 후 왕위는 장남인 문종에게 계승되었다. 그러나 어릴 적부터 잔병치레가 많았던 문종의 병약함은 세종의 근심거리였다. 세종 자신도 건강이 악화되어 대리청정의 형식으로 세자에게 정치를 맡겼지만 불안감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러한 우려대로 1450년 2월 세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 문종은 대부분의 시간을 병상에서 보내다가 1452년 5월 사망했다.

사망 직전 문종은 이제 겨우 12살밖에 되지 않은 어린 세자가 걱정되었다. 문종은 고명대신(誥命大臣·왕의 유지를 받드는 대신) 김종서, 황보인 등을 불러 마지막으로 세자를 부탁하고 눈을 감았다. 그러나 문종의 부탁은 새로운 비극의 싹을 잉태하고 있었다.

세자가 문종을 이어 단종으로 즉위하자 김종서가 좌의정, 황보인이 우의정이 되었고 왕은 형식적인 결재만을 한 채 모든 정사는 의정부에서 관할하는 이른바 의정부 서사제가 본격화되었다. 태종 때 신권의 비대를 우려하여 폐지한 의정부 중심의 정치체제가 단종의 즉위로 다시 그 빛을 본 것이다.

◇수양대군의 심복 임어을운이 김종서와 두 아들을 내리친 철퇴.
태종이 골육상쟁을 치르면서 확보한 강력한 왕권은 세종 시대에 이르러서는 왕권과 신권이 조화되는 형태로 나아갔지만 문종 단종과 같은 약한 왕이 연이어 즉위하면서 권력의 균형이 깨지고 신하가 주도하는 정치체제가 자리를 잡게 된다. 정도전이 그토록 희구하였던 재상중심체제로 회귀했고, 피를 보는 진통 속에서 겨우 왕권 안정을 다잡은 태종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가는 순간이었다.

의정부 대신들은 어린 왕을 보필한다는 이유로 일명 ‘황표정사(黃標政事)’를 하였다. 이것은 조정에서 인사 지명권을 위임받은 신하들이 황색 점을 찍어 대상자를 표시하는 방식으로, 그만큼 신하들의 권력 남용의 위험성이 있는 제도였다. 김종서, 황보인 등은 자신들의 권력 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세종의 3남인 안평대군과 손을 맞잡았다. 권력욕이 강하고 야심만만한 수양대군보다는 조정의 대신들과도 비교적 친밀한 교분을 가진 학자풍의 왕자 안평대군이 이들에게는 훨씬 부담이 적었기 때문이다.

#2. 수양대군의 반격과 대호(大虎)김종서의 죽음

이러한 신하들의 권력 강화에 대해 수양대군은 칼을 갈고 있었다. 누구보다 김종서가 그의 주된 목표였다. 운명의 날 새벽, 세조는 측근인 권람, 한명회, 홍달손 등을 불러 구체적으로 김종서 제거 계획과 의지를 분명히 밝혔다. 
◇충남 공주시 장기면에 조성돼 있는 김종서의 묘. 김종서는 1453년 두 아들과 함께 자택에서 격살되고 대역모반죄라는 죄명으로 효시된 계유정난의 첫 번째 희생자였다.

“오늘은 요망한 도적을 소탕하여 종사를 편안히 하겠으니, 그대들은 마땅히 약속과 같이 하라. 내가 깊이 생각하여 보니 간당(姦黨) 중에서 가장 간사하고 교활한 자로는 김종서 같은 자가 없다. 저자가 만일 먼저 알면 일은 성사되지 못할 것이다. 내가 한두 역사를 거느리고 곧장 그 집에 가서 선 자리에서 베고 달려 아뢰면, 나머지 도적은 평정할 것도 없다. (…) 지금 간신 김종서 등이 권세를 희롱하고 정사를 오로지 하여 군사와 백성을 돌보지 않아서 원망이 하늘에 닿았으며, 군상(君上)을 무시하고 간사함이 날로 자라서 비밀히 이용에게 붙어서 장차 불궤(不軌)한 짓을 도모하려 한다. 당원(黨援)이 이미 성하고 화기(禍機)가 정히 임박하였으니, 이때야말로 충신열사가 대의를 분발하여 죽기를 다할 날이다. 내가 이것들을 베어 없애서 종사를 편안히 하고자 하는데, 어떠한가.”

사실 쿠데타 이전부터 수양대군은 한명회, 권람, 신숙주 등 재사(才士)들과 양정, 홍달손 홍윤성 등 무사들을 심복으로 끌어들이면서 서서히 거사를 준비해 나갔다.

그리고 거사 1년 전인 1452년 9월 단종의 즉위를 인정하는 명나라 황제의 사은사를 자청하면서 자신에게는 권력욕이 없다는 것을 알려 대신들의 견제를 풀게 했다. 이때 사은사 수양과 함께 명에 갔던 것을 계기로 신숙주는 수양의 편에 서게 된다. 신숙주가 철저히 수양의 사람이 된 것은 이러한 개인적인 인연이 크게 작용했다.

귀국 후 본격적으로 휘하에 재사들과 무사들을 끌어들인 수양은 무엇보다 정국을 장악하고 있는 김종서의 제거만이 실추된 왕권을 회복할 수 있는 길이라 믿었다. ‘수양대군의 장량’으로 지칭되었던 모사꾼 한명회는 김종서와 황보인의 집에 염탐꾼을 들여 이들의 동선(動線)에 대한 정보를 입수하였다.
◇경기 남양주시 진전읍 부평리에 있는 조선 세조의 능인 광릉. 사적 제197호로 지정돼 있다.

마침내 1453년 10월10일이 거사일로 정해졌다. 수양은 거사 당일 직접 김종서의 집을 방문하였다. 자신의 심복 군사 일부만을 대동하였기 때문에, 김종서는 크게 경계하지 않고 있다가 수양의 지시를 받은 심복들에 의해 아들과 함께 철퇴를 맞았다. 수양이 김종서에게 청을 드릴 것이 있다며 편지를 건넸고, 김종서가 편지를 보려고 고개를 숙이는 순간 임어을운이 재빨리 철퇴를 휘둘렀다.

갑작스런 공격을 받은 김종서가 쓰러지자 아들 승규가 아버지의 몸을 덮었다. 그러나 다시 날아온 수양의 심복 양정의 칼을 맞고 두 사람은 쓰러졌다. 세종 때 북방 육진 개척에 큰 공을 세우며 오늘날 우리 영토를 확립하는 데 주역이 된 인물, 대호(大虎·큰 호랑이)라는 별명으로 여진족에겐 두려움의 대상이 되었던 인물이었지만, 수양의 계획된 기습공격에는 속수무책이었다.

세종∼단종 시대를 이끈 거물 정치인 김종서와 그의 아들 승규가 수양대군과 함께 온 자객들의 철퇴를 맞고 쓰러짐으로써 권력은 일순간에 수양에게로 넘어갔다. 계유정난 이후 단종은 왕의 자리를 지켰지만 실질적인 권력자는 삼촌인 수양대군이었고, 이제 단종은 허수아비 왕으로서 수양에게 왕위를 물려줄 시기만을 찾는 처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실제 수양대군은 단종을 압박하여 1455년 조선의 7대왕 세조로 자리를 잡게 된다.

#3.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

김종서 살해 후 수양은 왕명을 빙자해 황보인을 비롯한 조정의 대신들을 불러들이게 했다. 그리고 이미 한명회 등에 의해 작성되어 있는 살생부(殺生簿)에 따라 ‘김종서가 황보인, 정분 등과 모의하여 안평대군을 추대하려 한다’는 것을 명분으로 내세우면서 정부의 핵심 인물들을 제거하였다. 
◇한명회의 수결(사인).                         ◇세조 어필.

한명회가 작성한 살생부에 따라 황보인, 조극관, 이양 등 살부(殺簿)에 포함된 인사들은 처형되었고, 정인지, 신숙주 등 생부(生簿)에 포함된 인사들은 목숨을 부지하고 세조의 대표적인 참모가 되었다. 이날만큼은 염라대왕 못지않은 권세를 누린 한명회였다. 대군중에서 가장 큰 경쟁자인 수양의 동생 안평대군은 강화로 유배한 후에 사사(賜死)되었다.

계유정난이 있던 날 단종은 수양에게 모든 군국(軍國)의 중사(重事)를 결정하게 했다. 수양이 정권과 병권을 완전히 장악한 것이다. 43명의 정난공신은 단종이 책봉하는 형식을 취했지만 모든 것이 수양의 뜻대로 이루어졌다. 수양은 자신을 포함하여 거사에 가담한 정인지, 한명회, 권람 등 12명을 1등 공신에 포함한 것을 비롯해 43명을 정난공신에 책봉했다. 당시 성삼문은 3등 공신에 올랐다. 수양이 성삼문과 같은 인재를 포섭하려 했고, 성삼문 또한 김종서 등 노성한 신하들의 월권에 비판적인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세조는 쿠데타 성공 이후 결국에는 왕위에까지 오른 후 집권의 명분과 도덕성의 취약점을 극복하기 위해 민본정치와 강력한 부국강병책을 추진하였다. 세조의 참모로 자리를 굳힌 신숙주, 정인지, 양성지 등은 세조를 도와 조선전기 학술과 문화사업을 주도해 나갔다. 세조의 의지대로 태종 시대에 그랬던 것처럼 육조직계제가 회복되어 왕권의 강화되었다. ‘경국대전’이나 ‘국조보감’ ‘동국통감’과 같은 편찬물은 왕권 강화와 함께 신하들의 역량을 적재적소에 투입한 세조 시대의 주요 성과물이었다.

세조 시대에 확립된 이러한 기반은 성종 시대 조선전기 정치, 문화를 완성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다는 점을 고려하면 세조의 집권을 부정적으로만 평가할 수는 없다. ‘성공한 쿠데타는 처벌할 수 없다’는 논리는 세조에게도 과연 적용될 수 있는 것일까?

유교정치 이념으로 볼 때 세조의 집권에는 명분과 정통성, 도덕성에 하자가 있었음은 분명하다. 당시에도 사육신과 같이 수양대군에 직접 대항하다가 처형된 지식인을 비롯하여 벼슬을 버리고 재야에 은거하면서 비판활동을 전개한 학자들이 상당수에 이르렀고, 이들은 결국 조선전기 사림파의 뿌리가 되었다.

그러나 국가의 공식 기록인 ‘노산군일기’는 세조의 힘에 밀려 단종은 ‘노산군’으로, 수양대군은 ‘세조’로 기록하였고, 그 후의 어떤 왕도 세조의 집권에 대해 문제를 제기할 수가 없었다.

단종의 묘호 회복과 사육신에 대한 복권도 200여년이 훨씬 지난 숙종 때에 조심스럽게 이루어졌다. 1691년(숙종 17) 숙종은 사육신의 복작(復爵)을 명하면서, ‘이 일은 실로 세조의 유의(遺意)를 계승하고 세조의 큰 덕을 빛내는 것이다’라고 하여 세조의 치명적인 아픔을 가능한 건드리지 않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숙종 시대에 단종과 사육신이 명예를 회복하면서 수양대군의 쿠데타에 대한 면죄부가 사라졌다.

집권에 성공했다고 하여도 불법적인 쿠데타가 면죄부가 될 수 없음은 현대의 정치사에 재현되고 있다. 한때 ‘성공한 쿠데타’로 선전되었던 1979년 12월12일 쿠데타의 주역, 전두환과 노태우는 대통령 자리에까지 올랐지만 결국은 역사의 심판대에 서서 각각 사형과 무기징역을 구형받았다.

‘성공한 쿠데타’의 원조 세조가 지하에서 전두환과 노태우의 말년 상황을 알게 된다면 어떤 입장을 취할까?

건국대 사학과 교수

shinby7@konkuk.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