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 스릴러물의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평가와 함께 2008 방송작가 대상을 탄 SBS 드라마 ‘신의 저울’의 유현미 작가. 그는 “작품을 쓰면서 한동안 눈이 안 보이기까지 했지만 일이 너무 즐거워 대본 스트레스를 즐긴다”고 말했다. |
지난해 쏟아진 수많은 드라마 중 최고의 작품을 썼다는 평가를 받으며 ‘2008 한국방송작가’ 대상을 탄 유현미(43) 작가. 그의 작품인 ‘신의 저울’은 거물급 스타도 없고 금요일 오후 2편 연속 방송이라는 ‘저주받은’ 편성에도 불구하고 시청자와 전문가 모두에게 극찬을 받았다.
해박한 법 지식을 토대로 한 탄탄한 시나리오와 긴장감 넘치는 극 전개로 어렵고 따분하게 여겨졌던 법정 스릴러 장르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는 찬사가 쏟아졌다. 전문직 드라마 특성상 해당 분야 관계자들의 평이 인색하게 마련인데 법조인들의 응원 메시지도 줄을 이었다. ‘드라마의 여왕’ 김수현 작가도 “드라마를 보면 작가의 함량이 느껴지는데 좋은 작가 같다”고 칭찬했다.
6일 오후 서울 여의도 작업실에서 유 작가를 만났다.
MBC ‘베토벤 바이러스’를 제치고 대상을 거머쥔 기분이 어떠냐고 묻자 “작년에 다른 작가가 상 타는 걸 뒤에서 지켜보면서 ‘나는 5년이나 10년 후에나 탈 수 있을까’ 생각했는데 이렇게 빨리 받을 줄은 정말 몰랐다”며 쑥스러운 듯 웃어보였다.
‘신의 저울’은 과거 우발적으로 살인을 저지른 사실을 숨긴 채 사법연수원을 거쳐 변호사가 된 김우빈(이상윤)과 연인을 죽인 진범을 잡고 동생의 억울한 살인 누명을 풀기 위해 검사가 된 장준하(송창의)를 중심으로 펼쳐지는 법정 스릴러물이다.
하지만 ‘신의 저울’은 자칫 빛을 보지 못할 뻔했다.
대놓고 국내 최대 로펌과 외환은행의 론스타 매각사건, 정치 검찰을 정면으로 겨냥했기 때문이다. 아무도 선뜻 나서지 않자 홍창욱 CP가 직접 연출하겠다고 자청했다.
홍 감독은 “‘저울이 반듯해야 공정한 게 아니라 사회적 약자에게 조금 더 기울어져야 진짜 공정한 것’이라는 표현에 반했다”며 “만약 SBS에서 안 되면 꼭 다른 방송사에서라도 드라마로 만들어야 한다”며 힘을 줬다고 한다.
유 작가는 “금융사건을 다룬다고 하니 홍 감독이 ‘그거 쓰면 우리 둘 다 잡혀가요’라며 웃었다”면서 “하지만 마음대로 쓰라고, 다 책임지겠다며 대본에 대해 전적으로 믿어줬기에 하고 싶은 얘기를 어느 정도 할 수 있었다”고 고마움을 표시했다.
그는 당초 금융 드라마를 쓰기 위해 2년간 준비하다가 법정드라마로 방향을 틀었지만, 법정드라마에 금융사건을 아우르면서 한풀이를 한 셈이다.
사법연수원생을 살인자로 설정한 탓에 연수원 측에서도 처음엔 난색을 표했다.
하지만 가장 많은 도움을 줬던 윤석렬 논산지청장은 “일반인과 법조인의 갭(간극)을 줄이고 싶다”는 기획 의도를 듣고는 “검사에 대한 인플레가 너무 심하니 그거 벗겨주시오”라며 손을 내밀었다고 한다.
‘신의 저울’ 시즌2가 나오는 것 아니냐는 기대감에 대해 그는 “바로 시즌2를 하면 법정드라마 전문 작가로 남을 것 같아 다른 장르의 얘기를 하고 싶다”면서 “오랫동안 무명 생활을 하다 보니 쟁여놓은 시놉시스가 많아 어떤 걸 할지 고르는 중”이라며 웃었다.
멜로에 법정이라는 배경이나 주인공의 직업만 차용했던 기존 드라마와 달리 세세한 부분까지 잘 그려내다 보니 작가의 남편이 검사라는 소문도 있었다. 확인 결과 소문은 사실이었다. 그의 남편은 대전지검을 끝으로 10여년 전 변호사로 개업했다. 하지만 “생각처럼 큰 도움은 못됐다”는 게 유 작가의 ‘해명’이다
하지만 다음 편 대본을 쓰느라 방송 볼 겨를조차 없는 그를 위해 남편은 언제나 시청자게시판에 쏟아지는 작품평을 읽어주고 마지막회에서는 굵은 눈물을 뚝뚝 흘려준 열렬한 지지자였다. 남편이 검사인 탓에 지방을 옮겨다니느라 ‘무명’ 단편작가 생활만 18년을 했다. 아이 뒤치다꺼리도 그가 장편을 할 수 없는 이유 중 하나였다.
답답한 마음에 KBS 극본 공모에 참가했다가 덜컥 당선됐고, 이후 아이가 기숙학교에 들어가자 맘 놓고 미니시리즈를 쓰기로 했다. ‘그린로즈’, 아침드라마 ‘사랑하고 싶다’가 그의 전작이다.
친구들이 입사시험 준비에 매진할 때 혼자 도서관 구석에서 대본만 썼던 우직한 여대생의 꿈이 20년 만에 이뤄진 것이다.
유 작가는 “‘신의 저울’로 큰 상도 받았지만 무엇보다 이 드라마를 하려던 목적이 많이 달성된 게 가장 기분이 좋다”면서 “앞으로도 비주류, 마이너들에게 힘을 주는 드라마를 하고 싶다”고 말했다.
작가는 주류와 비주류의 경계에 한 발씩 놓고 사는 사람이라는 것. 그 둘이 소통하도록 연결해주는 게 ‘작가의 업’이라는 데 그는 방점을 찍었다.
김수미 기자 leolo@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