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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보다 배역으로만 기억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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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씨 표류기’의 남자 김씨 정재영
정재영(39)만큼 스크린에서 캐릭터만 남겨놓고 흔적 없이 사라져버리는 배우가 또 있을까. ‘실미도’ ‘웰컴 투 동막골’ ‘강철중’ 등의 흥행을 이끈 그이지만 여전히 정진영, 장진영과 헷갈리는 관객이 많다. 약한 인지도 뒤에는 상대적으로 넓은 연기 스펙트럼과 배우를 압도하는 강한 캐릭터가 자리한다. 그는 어수룩한 총각(‘아는 여자’ ‘나의 결혼 원정기’)에서 섬뜩한 눈빛의 악역(‘피도 눈물도 없이’ ‘거룩한 계보’)까지 그의 필모그래피에는 정형화된 이미지가 없으나 그가 분한 캐릭터는 영화에 효과적으로 녹아든다.

장르나 스토리에 따라 늘 새로운 색깔과 무늬를 뽑아내는 배우는 관객이나 연출자에게 이상적일 수 있다. 하지만 대중의 인기를 먹고산다는 배우 자신에게 이러한 현실은 억울하진 않을까. 그는 “정재영이란 사람은 사라지고 배역만 남았다는 의미겠으니 배우로선 최고의 찬사일 것”이라고 외려 기뻐한다.

14일 개봉한 ‘김씨 표류기’의 남자 김씨도 그랬다. 최근 서울 신사동 한 카페에서 만난 정재영은 “딱히 떠오르는 캐릭터도, 상대 배우도 없어 처음엔 너무 낯설고 막막했다”면서 “샐비어를 따 먹고, 오리배를 떠나보내고, 자장면을 만들어 먹으면서 수개월간 웃고 울다 보니 어느새 남자 김씨가 돼 있더라”고 말했다.

사실 정재영은 ‘나의 결혼 원정기’나 ‘바르게 살자’ 등 휴먼 코미디에서 특출 난 장기를 발휘했다. 그는 자신을 치켜세우는 배짱과 뻔뻔함은 없지만 현실에서 공유되는 방식에 대해 마냥 동의할 수만은 없어 한발짝 뒤로 물러서 무뚝뚝하게 한마디 내뱉고는 바로 고개를 돌려버리는 어수룩한 원칙주의자 역할을 주로 맡았다. 현실과 원칙의 괴리에서 오는 불협화음이 웃음을 유발하고 이로 인해 늘 상처받을 수밖에 없는 인물의 ‘뜨거운 눈물’이 감동을 안긴다.

◇정재영은 “영화에서 두 김씨가 서로를 통해 행복과 희망을 찾는 모습을 보며 관객들도 힘을 얻어 돌아갔으면 싶다”고 말한다.
이제원 기자
도심 한가운데 외딴섬에서 홀로 지내게 된 남자 김씨의 수개월간 표류기를 담은 이 영화 역시 유머와 페이소스의 최적점을 본능적으로 포착하는 정재영식 코믹 연기가 제대로 빛을 발하는 영화다. 정재영도 처음에는 기발한 상황 설정과 재치 넘치는 대사, 따뜻한 메시지 등 평소 작품 선택에서 최우선시하는 요소를 두루 갖춘 이 영화의 시나리오를 읽고난 뒤 바로 이해준 감독의 캐스팅 제안에 승낙할 정도로 감격스러웠다고 한다.

그러나 이내 부담감이 엄습했다. 초반 20여분간 남자 김씨만 등장할 정도로 일인극에 가까운 영화여서 그 자신이 제대로 김씨의 감정을 표현해낼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앞섰다. 그는 “작품 들어가기 전 감독님에게 ‘확신이 있냐’고 물었더니 ‘정 선배밖에 할 사람이 없어요’라고 말하더라”면서 “그 말 한마디 믿고 촬영 5개월 동안 준야생 생활을 감내했다”고 말했다.

7㎏가량을 감량하고 손발톱, 수염을 길러야 하는 육체적 고생이 계속됐지만 상대 배우 없이 혼자서 주인공의 감정선을 책임져야 하는 부담감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는 “한정된 배우와 형식, 소재라는 한계 탓에 너무 과하게 표현하면 작위적으로 보이고 너무 절제하면 지루해질 수 있었다”면서 “절제하는 듯하면서 오버하고 과한 듯하면서도 점잖게 가는 리듬감을 살리는 데 주력했다”고 말했다.

이해준 감독은 ‘김씨 표류기’를 “섬처럼 떠 있는 인간들의 소통의지에 관한 영화”라고 소개했다. 자살을 꿈꾼 남자 김씨가 삶을 다시 부여잡는 계기는 ‘100년 만에 맛보는 달콤한’ 샐비어 꿀이었고 여자 김씨(정려원) 등 세상과의 소통이란 ‘희망’을 다시 꿈꾸게 되는 매개체는 자장면이다. 배우로서 정재영의 자장면은 뭘까. 그는 “첫째는 일단 많은 관객이 이 영화를 보고 따뜻함과 희망을 떠올렸으면 하는 것이고, 둘째는 10년이 지난 뒤에도 내가 계속 연기를 하고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라고 말했다.

송민섭 기자 stsong@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