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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화 속 여성] 샤르댕-식사 전 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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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15세 처음 알현하던 날, 선보이기 위해 가져간 그림
“그의 색채들은 나란히 누운 채 배열되어 있으며, 영롱한 빛의 반사로 가득 찬 채 우리가 만질 수 없는 사물이 된다.”

반 고흐가 동생 테오에게 쓴 편지에서 샤르댕의 작품을 두고 한 말이다. 장 바티스트 시메옹 샤르댕. 우리에겐 그다지 친숙한 이름은 아니다. 그는 보잘것없는 사물을 주제로 한 정물화로도 이름을 알렸지만, 조용하고 사실적 분위기의 일상사를 담은 풍속화에서도 두각을 보였다. 구도의 균형미가 두드러지고, 시대의 방종이나 사치를 경계하는 교훈적 내용이 담겨 있기로도 유명하다.

그의 작품에는 은은하고 부드러운 아우라가 작품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 정물과 채색의 조화, 중간 톤의 색조에 의한 침착하고 은은한 분위기, 과장되지 않은 통일감, 일상에서 느껴지는 따뜻한 휴머니티 등이 샤르댕의 화풍이다. 특히 샤르댕 스스로에게 의미 있는 작품인 ‘엄마’ 시리즈는 그의 화풍의 특성이 모두 반영되었다고 평할 만하다. 샤르댕이 이 그림에 가진 애착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처음 루이15세를 알현하던 날, 왕에게 선보이기 위해 가져간 그림이 바로 이것이었다고 한다.

살림살이가 넉넉해 보이지 않는 중산층 가정. 고단한 듯 보이는 어머니는 두 딸을 위해 상을 차린다. 상차림이라곤 하지만, 준비된 음식은 수프가 전부다. 시장이 반찬이라며 서로를 다독여야 할 분위기의 식탁 앞에서, 큰딸과 어머니의 시선이 한쪽 구석에 앉은 작은딸에게로 향한다. 살포시 손을 모으고 있는 작은딸의 모습은 영락없이 ‘식사 전 기도’의 포즈다. 그런데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녀의 언니의 눈엔 당혹감이, 엄마의 얼굴에도 무어라 말하기 어려운 복잡한 감정이 엿보인다. 그림의 주인공 격인 작은딸의 표정이 보이질 않으니, 작품 속 이야기는 관객의 상상에 맡길밖에. 짐작하건대 귀여운 꼬마숙녀는 ‘날마다 우리에게 양식을 주시는 은혜로우신 하나님 참 감사합니다∼’라고 새처럼 노래할지도, 혹은 식탁 위에 놓여 있는 수프가 묽다고 타박을 놓을 수도 있겠다. 

심형보 바람성형외과 원장
샤르댕이 활동하기 전인 17세기부터 장르에 따라 회화의 등급이 존재하였다고 한다. 가장 높은 수준에 역사화, 그다음으로 초상화와 풍경화, 그리고 가장 낮은 수준에 풍속화가 자리 잡고 있었다. 말하자면 귀족이 아닌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 이야기는 가장 천한 계층의 화가가 그리는 저급한 볼거리로 치부됐던 셈이다. 이런 맥락을 보건대, 샤르댕을 위시한 당대의 풍속화가들은 예술이라는 도구를 가지고 시대의 정신을 지배하는 물질적 관념에 도전하여 ‘진정 의미 있고, 존중할 만한 아름다운 가치가 무엇인가’라는 화두를 던진 개척자들이라 부르고 싶어진다.

영국의 시인이자 평론가인 매슈 아널드는 예술에 대해 “존재의 부족한 부분을 분석하고, 그 해법을 제시하기도 하는 ‘삶의 비평’이다”고 말했다. 예술이란 아름다움이 가지는 다양한 스펙트럼을 우리 모두가 균형감 있게 볼 수 있도록 가교역할을 하는 것이라 풀이해도 되겠다.

모든 예술의, 예술가의 목적은 ‘세상을 더 아름답게, 더 낫게, 더 행복하게’ 만드는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예술가는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사람이며, 바꿔 말하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드는 이들이면 누구나 예술가이자 아티스트인 셈이다.

심형보 바람성형외과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