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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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단 40년 맞은 이시영 시인의 '긴노래 짧은 시'

'이야기 詩'서 '짧은 詩'로… 40년 문학인생 오롯이 담겨
이시영(60·사진) 시인이 올해로 등단 40년째를 맞고 이순에 이르렀는데, 이를 기념하여 김정환 고형렬 김사인 하종오 시인이 그동안 이 시인이 펴낸 11권의 시집에서 골라낸 시들로 ‘긴 노래, 짧은 시’라는 시선집을 창비에서 펴냈다. ‘창작과비평’의 편집자로 청춘과 중년을 보내면서 문인들의 민주화투쟁 일선에서 ‘사무총장’ 역할을 해냈고, 이야기시라는 독특한 형식과 정서를 제대로 체현해낸 뒤 점차 짧은 시로 변해갔던 그이의 시적 이력이 이 시선집에 알뜰하게 담겼다.

“용산역전 늦은 밤거리/ 내 팔을 끌다 화들짝 손을 놓고 사라진 여인/ 운동회 때마다 동네 대항 릴레이에서 늘 일등을 하여 밥솥을 타던/ 정님이 누나가 아닐는지 몰라/ …식모 산다는 소문도 들렸고/ 방직공장에 취직했다는 말도 들렸고/ 영등포 색싯집에서 누나를 보았다는 사람도 있었지만/ 어머니는 끝내 대답이 없었다/ 용산역전 밤 열한시 반/ 통금에 쫓기던 내 팔 붙잡다/ 날랜 발, 밤거리로 사라진 여인”(‘정님이’ 부분)

‘에레나가 된 순이’ 같은 정님이 이야기가 서러운 노래처럼 흔연히 흘러가는 이 시편은 등단 초기 1970년대의 작품이다. 역시 이 시기에 “장사나 잘되는지 몰라/ 흑석동 종점 주택은행 담을 낀 좌판에는 시푸른 사과들/ 어린애를 업고 넋나간 사람처럼 물끄러미/ 모자를 쓰고 서 있는 사내/ 어릴 적 우리집서 글 배우며 꼴머슴 살던/ 후꾸도가 아닐는지 몰라”라고 읊었던 ‘후꾸도’는 ‘정님이’와 나란히 이시영 이야기시의 전형을 보여준다. 그러다가 1990년대에 이르면 그의 시는 짧아진다.

“가로수들이 촉촉이 비에 젖는다/ 지우산을 쓰고 옛날처럼 길을 건너는 한 노인이 있었다/ 적막하다”(‘사이’ 전문) “새끼 새 한 마리가 우듬지 끝에서 재주를 넘다가/ 그만 벼랑 아래로 굴러떨어졌다/ 먼 길을 가던 엄마 새가 온 하늘을 가르며/ 쏜살같이 급강하한다// 세계가 적요하다”(‘화살’ 전문) “이 밤 깊은 산 어느 골짜구니에선 어둑한 곰이 앞발을 공순히 모두고 앉아 제 새끼의 어리고 부산스런 등을 이윽한 눈길로 바라보고 있겠다.”(‘애련哀憐’ 전문)

‘애련’과 ‘화살’의 ‘사이’는 적막하고 적요하며 이윽하다. 깊은 여운과 단아한 언어의 운용을 사랑하던 그가 근년에는 아예 신문 기사 한 토막을 ‘게이트키핑’하는 것으로 시를 대체하는 실험을 감행하기도 했다. 시로 떠받치기에는 갈수록 현실이 더 무거워지는 것인지. 이시영 시의 다음 단계가 궁금하다. 김정환 시인은 시집 뒤 발문에 이렇게 썼다.

“아주 오래전부터 이시영 시의 ‘모던’에 미달하는 작품은 아무리 서정적이라도 서정시가 될 수 없고, 이시영 시의 서정에 미달하는 작품은 아무리 현대적이라도 현대시가 될 수 없었다. 그렇다. 이시영이라는 이름은 하나의 척도다. 시에서도 그렇고 사회-인간적 관계에서도 그렇다. 돌이켜보면 그의 사랑을 많이 받았으나 나 같은 것은 공연히 숨결만 거친 한 마리 대책없는 짐승에 지나지 않았다.”

조용호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