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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남 없인 나라도 없다”는 충무공과 여수의 인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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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세종로 광화문광장의 이순신 장군 동상
이제 20일 뒤다. 1968년부터 서울 세종로 광화문광장을 지켜온 충무공 이순신 장군 동상이 외로움을 벗어나게 된다. 10월 9일 광화문광장에 세종대왕 동상이 들어선다. 당장 수도 서울에서부터 성군 세종대왕과 성웅 이순신 장군에 대한 애정과 관심이 더 커질 것이다.

물론 두 영웅에 대한 후세의 존경과 사랑의 마음은 지역을 가리지 않는다. 대왕과 장군이 조선 팔도에 남긴 추억꺼리도 다양하다. 주로 한양에 머물며 선정을 펼쳤던 세종대왕에 비해, 충무공과 각 지역의 인연은 남다르다. 그래서인지 충무공과 관련된 축제와 인연을 강조하는 고장도 많다. 충무공이 태어난 서울을 비롯해, 외가이면서 어린 시절을 보낸 아산, 한산대첩과 명랑대첩의 배경인 통영과 진도 등 전국에 걸쳐 폭넓게 분포한다.

충무공과 인연을 어느 지역보다 강조할 만한 고장이 2012년 엑스포가 열리는 전남 여수다. 충무공은 1591년 2월 13일 전라좌수사로 임명돼서 임진왜란 와중인 1593년 7월 14일까지 전라좌수영이 있던 여수에서 거주했다. 수영이 한산도로 옮겨진 뒤에도 이곳과 인연을 맺었으니, 충무공은 약 8년 동안 전라좌수영과 함께했다고 할 수 있다. 왜의 침략에 대비해 1479년에 설치돼 1895년까지 존속된 전라좌수영과 여수 수군사령부는 417년 동안 300명 이상의 사령관과 인연을 맺었다. 이들 중 충무공은 그 누구와 비교할 수 없는 탁월한 지도력을 발휘했다. 

“약무호남 시무국가”(若無湖南 是無國家) ‘호남이 없었다면 곧바로 나라도 없어졌을 것이다’는 뜻이다. 조선 실학자 유득공이 1795년 편찬한 이순신 문집 ‘이충무공전서’에 들어 있는 글이다. 충무공이 이 말을 할 수 있었던 것도 여수를 떼놓고 생각할 수는 없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전라좌수영의 장교와 병사들은 대부분 인근 지역에서 어업을 생계로 이어온 이들이었다. 그래서 충무공은 호남을 중심으로 나라를 구할 수 있었다고 평가한 것이다. 충무공을 따르던 조선 해군과 호남 민중이 지킨 여수 등 남해 앞바다는 ‘승전의 기운’이 넘치던 곳이었다. 이를 통해 호남의 곡창지대를 지킬 수 있었고, 왜군이 남해와 서해 바다를 건너 북쪽으로 이동하는 것을 차단할 수 있었다.

충무공은 이곳에서 거북선을 만들었다. 그리고 손수 제작과 싸움을 진두지휘한 거북선 전투로 연전연승의 기록을 이어갈 수 있었다. 거북선이 있어서 가능한 기록이고, 싸움이었다. 그리고 그 거북선이 머물며 숨을 고르던 ‘승리의 시발점’이 여수였다. 전라좌수영 여수에 머물던 충무공과 그의 해군들은 경상우수영과 경상좌수영까지 진출해 왜군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여수에서 조선 해군의 사기와 힘이 ‘충전’됐고, 여수에서 왜군의 두려움이 시작했다. 400년이 지난 뒤에도 여수가 충무공과 인연을 강조하는 이유이다. 또한, 다른 어느 지역에 비해 ‘충무공 마케팅’이 타당성을 갖는 이유이기도 하다.

◇전라좌수영의 객사였던 여수 진남관

뒤늦은 감이 있지만, 전남 여수시가 8월에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유적지를 관광코스로 개발해 시범 운영했다. 일정은 모두 3종류였다. 가장 긴 것은 1박2일이었으며, 하루, 한나절 코스도 마련됐다. 프로그램에 참여한 관광객의 반응은 천차만별이다. 뒤늦게라도 여수와 밀접한 관계를 맺어온 충무공의 뜻을 기릴 수 있어서 좋았다는 평이 우선 눈에 띈다. 급조했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는 평가 또한 있었다. 그래서 제대로 된 ‘여수와 충무공의 끈과 인연’을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전문가들의 지적은 타당하다.

여수는 꽤 오랫동안 충무공을 기억하고 자랑해 왔다. 전라좌수영의 객사인 진남관(국보 제304호)과 이 충무공의 사당인 충민사(사적 제381호), 거북선을 건조한 것으로 알려진 선소,  흥국사, 충무공의 공훈을 기리는 타루비(墮淚碑보물 제 1288호), 충무공의 어머니가 난을 피해 잠시 머물던 이충무공자당기거지, 충무공의 지휘를 받으며 호국불교의 전통을 이은 승병들이 훈련을 받은 흥국사 등 충무공과 관련된 유적이 많이 남아 있다.

먼저, 충민사. 충무공을 기려 세운 사당이다. 전쟁 직후인 1601년에 세웠으니 벌써 400년이 넘었다. 선조가 직접 이름을 내린 사액서원으로, 충무공을 기린 최초의 사원으로 알려져 있다. 아산의 현충사보다는 103년, 통영의 충렬사보다는 62년 앞섰다. 충무공과 같은 시간을 보냈던 여수 사람들의 애정이 드러난 사당으로 볼 수 있다. 충민사 앞에는 궁궐과 왕릉 앞에 주로 서 있는 하마비(말에서 내리라는 표지석)가 있다. 충무공이 당시 사람들에게 어떻게 인식됐는지 미뤄 짐작할 수 있다. 충민사는 대원군의 서원철폐령과 일제의 철거로 잠시 모습을 잃었으나, 광복 이후 복원됐다.

충무공이 숨을 거둔지 6년 후인 1603년 휘하 군사들이 장군의 덕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한 타루비에는 애통함이 묻어난다. 비문은 ‘영하수졸위통제사 이공순신입단갈명왈타루 개취양양인사양우이망기비즉루필타자야 만역삼십일년추립(營下水卒爲統制使 李公舜臣立短碣名曰墮淚 蓋取襄陽人思洋祐而望其碑則淚必墮者也 萬歷三十一年秋立)’이라고 적혀 있다. ‘영하의 수졸들이 통제사 이순신을 위하여 짤막한 비를 세우니 이름은 타루이다. 중국의 양양 사람들은 양호를 생각하면서 그 비를 바라다보면 반드시 눈물을 흘린다는 고사에서 인용한 것이다. 1603년 가을에 세우다’는 내용이다.

조그마한 어촌에서 한국을 대표하는 해양도시로 성장한 여수가 조선시대에는 이처럼 군사도시로 이름을 알렸다. 전라좌수영을 중심으로 외침을 극복하고, 승리의 계기를 마련한 곳이었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충무공과 생업에 종사한 토착민들이 있었다. 역사는 이를 인정했는지 2012년 이곳에서 세계박람회를 열어 그 뜻을 간접적으로나마 알릴 수 있게 됐다.

박종현 기자 bali@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