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메뉴 보기 검색

[시론] ‘루저녀’와 장기하

두 사람 모두 엄친아·엄친딸

외모지상주의는 공포심 때문
전상진 서강대교수·사회학
‘루저’(loser·패배자)들이 봉기했다.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공영방송의 한 오락 프로그램에서 출연자들과 제작진은 패배자의 기준을 제시했다. 남성 루저들은 외모, 특히 신장을 갖추지 못하고 돈과 성공 같은 ‘조건’을 충족지 못하는 자들이다. 여성 낙오자들은 조건보다 사랑을 중시하며, 실용적인 명품을 멀리하고 예쁜 핸드백이 아니라 ‘책 많이 들어가는 가방’을 선호하는 사람들이다. 이 엄격한 기준으로 수많은 루저들이 호명됐고, 이들은 ‘난’을 일으켜 이에 화답했다.

최근 루저 문화는 대중문화의 중요한 아이템으로 자리 잡았다. ‘88만원 세대’(월급 88만원의 비정규직)의 불안정한 삶과 암울한 미래를 다루는 이른바 ‘백수 소설’은 트렌디한 상품이 됐다. 그들의 삶을 노래한 인디밴드 ‘장기하와 얼굴들’은 대중음악의 혁신자로 대접받는다.

루저로 이목을 끈 두 인물, 장기하와 루저녀는 모두 ‘엄친아’, ‘엄친딸’이다. 이들은 모두 ‘엄마 친구의 아들과 딸들’(비교 대상을 통칭하는 말)의 속성을 지녔다. 음악적으로 성공한 일류대 출신의 대중스타, 실력이 좋은 데다가 미모와 신장 등 외모도 되는 모 대학의 ‘퀸카’. 엄마 친구들과 비교당했던 쓰라린 과거를 지닌 사람들이 지지하기 어려운 이들 ‘엄친’ 자녀들. 하지만 이들은 자신들과 거리가 먼 루저를 통해 한 사람은 명성을, 다른 사람을 악명을 얻었다.

명성과 악명을 가르는 기준은 시선의 온도차다. 엄친아 장기하는 루저를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본다. 여기서 따뜻함은 낭만화나 영웅화와는 거리가 멀다. 실패자는 낭만적으로 보기에는 너무 처절하다. 그의 따스함은 삶의 실패가 우리 모두에게 친근하다는 점을 담담히 밝힌 것에서 나온다. 정규직이든 비정규직이든, 혹은 명문대를 나왔든 그렇지 않든 상관없이 우리네 인생에는 늪과 수렁, 함정과 지뢰가 곳곳에 깔려 있다. 안정과 확실성은 오늘날 많은 사람이 원하고 추구하는 가치이자 목표이지만 현실은 이와 사뭇 다르다.

우리는 이미 루저이거나 그럴 소지를 다분히 지녔다. 이 때문에 루저들은 우리 시대의 영웅들, 예컨대 ‘탄탄한’ 직장인을 부러워하지만 적으로 삼지 않는다. 역으로 이들 영웅은 루저들을 깔보지만 부도덕한 존재로 낙인찍지 않는다. 적도 부도덕한 존재도 아니기에 서로 소통, 연대할 수 있다. 요컨대 삶의 불안성과 미래의 불확실성에 대한 인정이 루저 문화의 온기를 만드는 동력이다.

엄친딸 루저녀의 시선은 매우 싸늘하다. 여기서 루저녀는 ‘바로 그’ 출연자가 아니다. 그는 당대 한국의 주류적 가치를 대변할 뿐이다. 주류적 가치는 외모, 성공, 승리다. 과정이나 내면은 고려 대상이 아니다. 문제는 외모다. 더욱 중요한 것은 성공과 승리 여부다. 수단과 방법의 적법성 따위는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다. 거주지, 자동차의 종류, 지갑의 두께가 인격의 척도이며 최종적인 판단 기준은 승리 여부다.

패자의 목소리는 승리자에 대한 시샘과 원한 어린 푸념이기에 들을 가치가 없다. 실패자들은 자신의 운명을 책임지지 못한 부도덕한 존재이기에 상대할 필요가 없다.

원한과 부도덕성에서 자신을 지키는 최선의 방책은 거리 두기다. 문제의 발언 ‘180cm’는 거리 두기를 표현한 최적의 은유다. 이 시선의 냉기의 원천은 소통을 대신한 단절, 연대를 대체한 장벽에 있다.

불안정성과 불확실성은 현대사회의 기본조건이다. 루저 문화는 이를 인정함으로써 승자와 패자를 잇는 역할을 한다. 루저녀가 대변한 외모지상주의적이며 성공만능적인 시선은 삶과 미래의 굴곡을 루저들의 운명으로서만 인정한다. 불안정성과 불확실성의 민주주의를 수용하기엔 너무 무섭기에 그렇다. 결국 그들의 냉혹함은 공포심의 반영이다. 따스함이 언제나 좋은 것은 아니다. 하지만 요즘처럼 추운 계절에는, 요즘처럼 사회적 갈등과 대립의 골이 깊은 때에는 냉기보다 온기를 찾는 것이 당연하다. 루저녀와 장기하에 대한 대접이 다른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

전상진 서강대교수·사회학

기고·칼럼은 본지 편집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