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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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발발 60돌] ⑥ 잊혀진 학도병

정부, 명부 부실관리로 참전인원도 몰라
혁혁한 전공불구 훈포장 서훈자 전무
정부선 “소급포상은 전례없다” 뒷짐만
#1 북한의 남침으로 서울이 함락된 지 하루 뒤인 1950년 6월29일, 수원에 모인 200여명의 학생들은 국방부 정훈국의 후원으로 비상학도대를 발족시켰다. 당시 한강 방어가 시급했던 군은 학도지원병을 받아들여 소총 1정과 실탄만 지급한 채 이들을 국군 혼성부대에 수십명씩 편입시켜 한강 방어선에 투입했다. 학도병은 국군과 함께 한강을 넘어오는 적을 맞아 최초의 전투에 참여했지만 여러 명의 사망자를 낸 채 후퇴했다.

#2 7월말 대구에는 ‘조국을 사랑하는 학도여! 조국의 운명은 여러분의 손에 달려 있다. 가자! 김석원 장군의 휘하로!’라는 학도병을 모집하는 격문이 곳곳에 나붙었다. 이를 보고 16세의 중학생에서부터 24세의 대학생에 이르기까지 87명이 자진입대했다. 이들 가운데 71명은 8월7일 김 장군이 수도사단장에서 3사단장으로 전보된 사실을 알고 경북 의성에서 포항으로 이동했다.

당시 북한군 12사단과 5사단은 포항 공격을 위해 남진하고 있었다. 국군 3사단은 이같은 긴박한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전방지휘소를 장사동으로 철수하고, 8월10일 학도병들을 M1소총으로 무장시켜 독립중대로 편성한 뒤 후방지휘소인 포항여중으로 이동시켰다.

북한군과의 교전은 다음날 새벽 시작됐다. 학도병들은 11일 오전 3시부터 11시간에 걸친 북한군의 4차례 파상공격을 막아냈지만 48명이 전사하고 10명이 포로로 잡히는 등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이 전투는 60년이 흘러 ‘포연속으로’라는 영화로 재연됐다.

◇ 학도의용군에 지원한 학생들이 군 장비를 지급받고 있다. 
박양호 대한학도의병 명예선양 기념사업 추진위원장 제공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나라를 지키겠다는 일념 하나로 전투에 참여한 학도병이 최소 2만여명에 이르고, 전사자도 7000여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이들 가운데 전투에서 전공을 세우고도 정부에서 훈포장을 받은 사람은 한 명도 없는 실정이다. 학도병 관련 단체들은 국방부와 국가보훈처, 국회 등에 서훈 추서를 요구하고 있지만 정부는 소급 포상은 전례가 없다는 이유로 난색을 표하고 있다.

육군본부가 2004년 펴낸 ‘학도의용군’ 책자에 따르면 학도의용군은 전쟁발발 초기부터 낙동강 전선에 이르기까지 중요시기마다 큰 역할을 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서울 동작구 흑석동 효사정공원에 세워진 학도의용병 현충비. 이 비는 1950년 8월 11일 경북 포항여중에서 북한군과 맞서 싸우다 산화한 48명의 학도병을 기리기 위해 1955년 건립됐다.
송원영 기자
학도의용군은 무엇보다 전쟁 초기 부족한 병력을 보충하는데 큰 도움이 됐다.

6·25 발발 당시 한국군은 ‘국군의 병력은 10만명을 초과할 수 없다’는 미군과의 협정에 따라 징병사업이 거의 중단된 상태였다. 이같은 상황에서 학도병들의 참전은 병력 수급의 물꼬를 트는 촉매제 역할을 했고, 이들은 안동전투와 다부동전투, 안강전투, 영천전투, 포항전투 등 대규모 전투에 직접 뛰어들었다.

또한 학도병들은 경계근무지원과 탄약운반, 후방지역 선무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고, 여학생들도 학도의용군에 참가하기도 했다.

하지만 정부의 명부관리 부실로 학도병에 참여한 인원조차 파악이 되지 않고 있다. 대한학도의용대는 전쟁기간 전투 참전과 치안활동, 가두선전에 참가한 학생을 27만5200명으로 집계했지만 중앙학도호군단은 전투 참가학생 2만7700여명중 전사자를 1394명으로 기록했다. 그러나 문교부 통계에는 학도의용군 5만여명 중 7000명이 전사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이같은 기록 부실로 학도병들은 전쟁이 끝난 지 60년이 지나도 전공을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

10여개 학도병 관련 단체는 재일학도의용군과의 형평성 문제를 제기하며 정부에 추후 서훈을 요구하고 있다.

대한학도의병동지회 윤병국 회장은 “정부는 1967년 재일학도의용군 642명 가운데 일본으로 돌아가지 않고 국내에 거주한 300여명에게 보국훈장을 수여했지만 우리(학도병)에게는 아무것도 해주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현재 국가보훈처가 국가유공자로 관리하고 있는 재일학도의용군은 본인 69명과 유족 224명이다.

이에 대해 국방부의 한 관계자는 “학도병들의 사연이 안타깝지만 60년이 지난 시점에서 개개인의 공적을 따지는 것은 불가능하다”며 “정부는 전공을 세우고도 포상이 누락된 경우를 방지하기 위해 1953년과 54년 두 차례에 걸쳐 구제포상을 실시하며 ‘이후 전투 전공에 대한 서훈 또는 추천을 일체 금한다’는 규정을 두었기 때문에 소급 서훈은 어렵다”고 말했다.

그는 “재일학도의용군 서훈의 경우 일본에서 생활하던 분들이 자발적으로 지원해 인천상륙작전 등에 참여했고, 이들의 공적을 입증할 기록이 남아 있어 가능했다”며 “1999년 12월과 2006년 6월 국회와 정부에서 학도병 추후 서훈 문제를 검토했지만 자료 부족과 ‘구제포상 금지’ 규정 등으로 부결됐다”고 덧붙였다.

국가보훈처의 한 관계자도 “일제시대에 독립운동을 한 사람도 기록이 없어 국가유공자로 등록이 안 된 경우가 있다”며 “우리가 보기에도 학도병들은 억울한 측면이 있지만 기록 미비 등으로 현 시점에서 100% 구제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6·25전쟁 60주년 기획팀= 신진호·안용성·조민중·조현일·장원주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