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메뉴 보기 검색

[기고] 한자·우리말 기수표현 혼동하는 방송

숫자를 세는 데는 기수(基數)와 서수(序數)가 있다. 그런데 방송에서 일부 아나운서들이 원고에 있는 숫자를 낭독할 때 ‘54’이면 ‘오십 사’라고 하지 않고 ‘오십 넷’이라고 기수를 혼합해 읽어 듣기가 거북하다. 방송은 우리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지대하므로 이에 관한 문제점을 살펴본다.

기수는 일·이·삼, 하나·둘·셋 등과 같이 물건의 집합에서 낱개의 많고 적음을 나타내는 자연수이다. 여기서 일·이·삼은 ‘한자식 표현 기수’이고, 하나·둘·셋은 ‘우리말식 표현 기수’이다. 또한 서수는 순서를 나타내는 수, 곧 첫째·둘째·셋째 등과 같은 것으로서 순서수이다.

◇조성국 경민대 외래교수
필자는 수년간 아나운서들의 숫자 표현을 관심있게 들어보았다. 그런데 4∼5년 전에는 드물게 한두 명이 ‘오십 넷’ 하는 식으로 ‘한자식 표현 기수’와 ‘우리말식 표현 기수’를 혼합해 방송하더니 요즘은 이렇게 표현하는 아나운서의 수가 느는 것 같아 염려스럽다.

필자가 숫자 표현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과거 군 장교교육을 받을 때로 거슬러 간다. 당시 구대장이 후보생들을 정렬시켜 놓고 인원파악을 위해 ‘번호’ 하면 ‘쉰’ 순서에서 ‘오십’ 하는 후보생이 있었다. 후에 알고 보니, 그 후보생은 성장 시 숫자를 셀 때 마흔 아홉 다음에는 ‘쉰’이라고 하지 않고 ‘오십’이라고 불렀기 때문임을 알았다. 오랫동안 입에 붙은 언어습관이 작용한 것이다.

우리의 일상 속엔 매스컴의 역할이 크다. 우리나라는 헌법에서 보장하는 권력의 3권 분립체제(입법, 행정, 사법)를 유지하고 있다. 이 세 기관이 서로 독립되어 견제와 균형을 유지하도록 한다는 것이 헌법의 기본 정신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이 세 기관뿐 아니라 언론도 함께 견제와 균형의 주체로서 역할을 한다는 뜻으로 일명 ‘제4부’라고 일컫는다.

폐쇄적이고 서열화된 사법부, 대통령의 철학에 따라 운영되는 행정부, 그리고 각 정당의 정략적 판단에 따라 집단으로 움직이는 입법부, 이 기관들의 활동이 국민의 의사와는 다를 여지가 충분히 있기에 이를 감시하는 것이 언론의 주요 역할이다. 언론은 헌법기관이 아닐 뿐이지 민주주의 체제 유지에 꼭 필요한 중요한 존재인 것이다. 따라서 언론의 힘과 책임은 막대하다.

방송심의에 관한 규정은 ‘방송은 저속한 표현 등으로 시청자에게 혐오감을 주어서는 안 되며(제27조 품위유지), 바른 언어생활을 해치는 억양, 어조 및 비속어, 은어, 유행어, 조어, 반말 등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제51조 방송언어)’고 명시하고 있다.

언어가 사상을 지배하고, 사상이 행동 성향을 좌우한다는 사실은 우리 모두 잘 알고 있다. 특히 방송에서 사용하는 언어 하나하나는 청소년은 물론 성인의 언어 습관에도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서 더욱 그렇다. 따라서 언론, 특히 방송은 바른 언어습관을 갖도록 하는 일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이고 앞으로 더욱 정확한 표현을 쓰는 데 노력을 다해야 할 것이다.

조성국 경민대 외래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