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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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재 4명 잃고서야..KAIST 대책 '만시지탄'

구성원들 피로감..'서남표식 개혁' 한계왔나
한국과학기술원(KAIST)이 그동안 논란을 빚어온 '징벌적 수업료'를 대폭 조정하겠다는 등의 계획을 밝혔지만 너무 늦은 감이 없지 않다.

서남표 KAIST 총장 등 학교 지도부는 7일 오후 기자회견을 열고 일정 성적 미만 학생들에 대해 차등 부과해오던 수업료를 8학기 동안은 면제해줄 계획이라고 밝혔다.

기자회견은 이날 오후 1시20분께 인천시 남동구 만수동의 한 아파트 1층 현관 앞 아스팔트 바닥에서 전날 휴학한 KAIST 2학년생 박모(19)군이 숨진 채 발견된 사실이 알려진 직후에 급히 마련됐다.

자살과 수업료 사이에 직접적인 인과관계가 적을 수도 있지만 지난 1월 전문계고 출신인 '로봇 영재' 조모(19)군이 숨진 뒤 3명의 인재가 더 스스로 목숨을 끊은 뒤에야 이 같은 대책을 발표한 것이다.

KAIST의 징벌적 수업료는 2007년 신입생부터 적용됐는데 서 총장은 취임 초 학생들이 무상교육 혜택 아래 저조한 성적의 과목을 거듭 재수강하면서 졸업을 하지 않아 면학 분위기를 해치는 모습을 보고 '미래 지도자가 될 학생들이 주어진 책임을 다하도록 하자'는 취지에서 이 같은 제도를 도입했다.

더불어 교수의 정년을 보장하는 일명 '테뉴어'에 대한 심사를 강화하고 학부 수업을 100% 영어로 강의토록 하는 등 잇단 '개혁' 조치로 KAIST의 위상을 한단계 끌어올렸다는 평가를 받아 지난해 연임에 성공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학내 구성원들로부터 "짧은 시간 안에 무엇인가 보여주기 위한 지나친 성과주의에 매몰돼 있다"거나 "학교 운영이 독선적으로 이뤄지고 있다", "소통이 부족하다"는 등의 지적을 받았다.

이 같은 구성원들의 개혁 피로감에도 서 총장은 연임 초 "기존 제도 등이 새로운 목표를 달성하는 데 부족하기에 개혁을 하는 것이다. 반대의견을 귀담아 듣겠지만 목표를 바꿀 수는 없다"며 개혁의 고삐를 늦추지 않았다.

비록 많을 경우 다른 국립대의 2배에 달했던 수업료 부담액이 절반 가까이로 줄어들기는 했지만 학생들은 지나친 경쟁에 엄청난 스트레스를 받아야 했다.

실제로 학내 상담센터에 이뤄지는 연간 2천여건의 학생 심층상담 가운데 진로나 대인관계, 이성문제 등보다 성적에 관한 것이 15% 안팎으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급기야 올해 들어 학생들의 잇단 자살이 불거졌고 징벌적 수업료 부과제도 등 서 총장이 도입한 경쟁체제가 도마 위에 올랐다.

한 학생은 대자보를 통해 "학점경쟁에서 밀려나면 패배자 소리를 들어야 하고 힘든 일이 있어도 서로 고민을 나눌 여유조차 없는 이 학교에서 우리는 행복하지 않다"며 "숫자 몇개가 사람을 평가하는 데 있어서 유일하고 절대적인 잣대가 됐고 우리는 진리를 찾아 듣고 싶은 강의를 선택하기보다는 그저 학점 잘주는 강의를 찾고 있다"고 학생들이 처한 상황을 적나라하게 표현했다.

또 학내 커뮤니티 사이트에는 "경쟁을 하려고가 아니라 더 많은 것을 배우기 위해 대학에 진학하는 만큼 학생들을 경쟁시킬 생각 대신 학생들에게 얼마나 더 가르쳐줄 수 있을지를 연구해야 한다"며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열정이 가장 중요한데 열정을 깎아내리면서 경쟁만 유도하는 것은 주객이 전도된 것"이라는 글이 오르기도 했다.

학교측으로서는 나름대로 신입생을 대상으로 대학생활 적응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새내기 지원실을 개설하는 등 노력을 기울였다지만 학생들이 토로한 글을 보면 그들이 앓고 있는 마음의 병이 왜 생겼는지 원인을 잘못 짚은 것이다.

한때 국내 대학가에 신선한 충격을 줬던 '서남표식 개혁'은 논란 속에 인재 4명을 떠나보낸 뒤에야 수정궤도에 들어섰지만 이를 KAIST 학생과 교직원들이 이전처럼 그대로 받아들일지는 더 두고봐야 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