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3월 11일 일본 동북부에서 발생한 규모 9.0의 대지진과 쓰나미, 원자력발전소 폭발로 일본 내 한류 열풍이 순식간에 정지된 상황에서 의외의 분야에서 새롭게 한류 열풍을 이어간 곳이 있다. 바로 출판 만화계다. 미래엔의 아동출판브랜드 아이세움(대표 김영진)이 수출한 과학학습만화 ‘지진에서 살아남기’ 일본어판이 지진 발생 이후 판매량이 급증하면서 한 주간 아마존재팬 아동학습분야 1위를 차지한 것. ‘지진에서 살아남기’는 세계에서 2000만부 이상 판매된 ‘서바이벌 시리즈’ 중 한 권으로, 혹독한 지진 속에서도 과학이론과 상식을 통해 주인공들이 생존하는 과정을 담은 학습만화다. 2008년 일본 시장에 진출한 이래 누적 판매부수 50만부를 기록하며 이미 스테디셀러로 자리 잡던 한국만화 서바이벌 시리즈가 대지진이라는 최악의 상황에서도 출판 한류의 불씨를 지킨 셈이다.
살아남기 시리즈를 개발한 박현미(40) 아이세움 편집장은 “일본 만화가 우리나라 만화 시장을 점령한 상황에서 반대로 우리의 만화가 일본 독자들에게 읽힌다는 데 값진 의미가 있다”며 감격스러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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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중국·대만·태국 등에 번역 수출된 아이세움의 '살아남기 시리즈'. 2008년 계약 개시 이후 2억 8500만원을 로열티로 벌어들였다. |
살아남기 시리즈는 현재 중국·대만·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로 수출되고 ‘보물찾기 시리즈’와 ‘내일은 실험왕’ 시리즈도 해외시장을 개척하고 있다. 성경을 만화로 풀어낸 ‘파워바이블’(전10권)은 어렵사리 미국 시장을 뚫는 데 성공했다.
지난달 28일부터 31일까지 이탈리아에서 열린 ‘볼로냐아동도서전’에서도 이런 양상은 그대로 반영됐다. 한국이 주빈국으로 선정돼 35개사가 참여한 2009년에 비해 다소 줄어든 27개사만 참가했지만 국제 경쟁력 있는 그림책과 만화를 펴낸 출판사들이 대거 부스를 차려 해외 출판 바이어들과의 저작권 상담은 되레 늘었다.
외국 출판 관계자들의 발걸음을 가장 많이 멈추게 한 곳은 물론 아동출판계의 노벨상으로 불리는 ‘라가치상’ 논픽션 부문에서 한국 출판물로서 처음으로 대상을 수상한 ‘마음의 집’과 우수상을 받은 ‘거짓말 같은 이야기’를 펴낸 창비와 시공주니어 부스였지만, 바로 옆에 위치한 학습만화 ‘WHY?’ 시리즈를 전시한 예림당의 아동출판브랜드 예림아이와 ‘WHO’ 시리즈를 들고 나온 다산북스, ‘살아남기 시리즈’를 공동전시한 CARROT KOREA 에이전시(대표 백은영), 그리고 졸업생들의 작품을 선보인 한국일러스트레이션학교(힐스) 부스도 이에 못지않게 북적였다.
# “저작권 수출은 신생아 입양”
“예림당이 국제도서전에 진출한 것은 나춘호 대표 시절인 1998년의 북경도서전이었습니다. 캔디북 시리즈로 알려진 ‘만화로 보는 세계고전’이 처음으로 로열티를 받고 수출했고, ‘WHY?’는 2002년 중국에 1500달러어치 수출한 게 효시입니다.”
볼로냐도서전에서 만난 예림당(대표 나성훈)의 자회사 예림아이 김대원(39) 대표는 2000년 유일한 남자 사원으로 입사해 국제기획실에서 주로 저작권 담당 일을 해오다 입사 11년 만에 대표로 승진한 젊은 CEO다. 예림아이는 ‘WHY?’ 시리즈를 비롯한 예림당 출판물의 저작권을 전담하며 자체 도서도 출판하고 있다. 지난해 ‘Why?’(전51권) 시리즈만으로 455억원(로열티 4억6000만원)을 벌어들인 것을 포함해 총매출을 517억원이나 올린 데에는 개발자인 백광균 이사와 그의 공이 적지 않다.
“책은 어린아이이고, 새 책은 신생아와 같습니다. 저작권 수출은 신생아 입양과 같습니다. 우리 아이를 잘 키워줄 부모를 찾는 마음으로 파트너를 고르고 협상합니다.”
한국서 3700만부나 펼려나간 예림당의 효자상품 ‘WHY?’ 시리즈는 현재 일본을 필두로 프랑스·러시아·중국·말레이시아·인도네시아·아랍권 22개국 등 총 36개국에 저작권이 수출되고 있다. ‘손바닥 시리즈’(전3권)는 스페인어권에, 다큐북 시리즈 ‘DMZ의 비밀’과 ‘곤충의 비밀’은 독일에 각각 수출하고 있다.
세계학습만화의 원조 출판사 격인 일본 가켄사(學硏社) 편집장으로부터 ‘‘WHY?’는 진정한 학습만화’라는 평가를 받고 역수출을 하게 됐을 때 가장 기뻤다는 김 대표는 “중국에서 짝퉁 브랜드가 나와 ‘WHY?’에 대해 상표권 등록을 했다”면서 “지금까진 인세 개념으로 진행했지만 앞으로 나올 영어판부터는 현지 출판사와 공동출판을 추진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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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왼쪽부터)김대원 예림아이 대표, 김선식 다산북스 대표, 박현미 아이세움 편집장, 이지선 강사 한국일러스트레이터학교 |
회사 창립 8년째인 다산북스(대표 김선식)는 2006년 ‘경영 천재가 된 CEO’와 ‘열여섯 살 네 꿈이 평생을 결정한다’를 중국에 수출한 이후 2007년 9건, 2008년 24건, 2009년 68건, 2010년 56건을 저작권 수출했다. 특히 2007년 저작권 전담 부서와 담당 직원을 뽑아 참가한 북경도서전에선 ‘여자라면 힐러리처럼’ ‘돈 걱정 없는 노후 30년’ ‘아프리카에서 온 암소 아홉마리’를 계약하는 성과를 얻어냈다.
만화 위인전 ‘WHO’ 시리즈(전30권)를 갖고 볼로냐도서전엔 올해 처음으로 부스를 차렸다는 김선식(41) 다산북스 대표는 “‘WHO’ 시리즈 중 중국은 ‘오바마’ ‘다윈’ ‘빌 게이츠’ 등 3권, 대만은 10권, 태국은 5권이 이미 출간됐고 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베트남과는 계약이 완료돼 올해 출간될 예정”이라며 “아직은 수출 건수와 액수가 미미하지만 이제 발을 들여놓은 만큼 꾸준히 증가시키겠다”고 말했다.
‘WHO’ 시리즈 완간과 ‘소설 ‘덕혜옹주’의 선전으로 지난해 사세를 키운 다산북스는 직원 50여명으로 150억원의 매출을 올렸다.
이정순 다산북스 저작권 팀장은 “수입보다 수출 업무가 훨씬 재미있고, 도서전 부스에 앉아 있다 보면 한국 콘텐츠의 세계화에 일조하고 있다는 자부심이 든다”면서 “좋은 책을 만들어준 편집자들과 우리나라 저작권 수출의 선구자인 김동휘 여원미디어 대표께도 감사드린다”고 말하며 활짝 웃었다.
# 힐스, 일러스트레이터 300명 양성
한국일러스트레이터도 국제 시장을 노크하는 데 유리하다. 해마다 서너 명씩 볼로냐도서전에서 ‘올해의 일러스트레이터’에 뽑히는 것은 세계가 그만큼 한국 작가의 손재주를 인정한다는 의미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3년째 볼로냐에 독립 부스를 설치해 45개 작품을 전시한 한국일러스트레이션학교(힐스·교장 권혁수 계원대 그래픽디자인학교 교수)를 대표한 이지선(41) 강사 겸 작가는 영국 킹스턴대학에서 학·석사과정을 마친 재원이다. 그녀가 일본에서 먼저 출판한 ‘검은 사자’는 아르헨티나와 출판권을 상담 중이고, 저서 ‘런던 일러스트 수업’(아트북스)은 5쇄를 찍었다.
기별 20명씩 16기가 수료해 벌써 300명 이상의 예비 일러스트레이터를 키워낸 힐스는 좋은 작가를 배출해 국내뿐 아니라 세계로 진출하는 게 교육목표다. ‘눈물바다’의 서현, ‘눈썹 올라간 철이’의 전미화, ‘얼음소년’의 조원희 등이 힐스 동문이다.
볼로냐(이탈리아)=조정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