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 17일은 시인 이상의 기일이다. 1910년 9월 23일에 태어나 고작 26년 7개월을 살았던, 얼굴이 백짓장처럼 하얀 청년이 한국 문학을 백 년 동안 지배하고 있다. 살아 있는 동안에는 집안 하나 건사하지 못했던 청년이고, 요즘으로 보면 대학도 마치지 못할 나이인데….
그는 천재이고 실향민이고 이방인이다. 말도 배우기 전에 큰집에 양자로 들어가서 큰아버지와 재취로 들어온 큰어머니와 큰어머니가 데리고 들어온 동생, 어찌 보면 서로 남 같은 사람들과 모여 살았다. 그리고 남들과 다른 문학을 추구하여 ‘악플’을 잔뜩 받고 뒤로 물러서야 했다.
본명이 김해경(金海卿)인 이상의 이름에 대한 유래는 해석이 분분하다. 소설가 박태원은 이상이 건축과학과 졸업 후 부감독으로 나간 공사장에서 인부들이 자기를 이씨인 줄 알고 이씨의 일본식 발음인 이상으로 잘못 부른 것에서 생겨났다고 듣고 동료 문인들에게 전했고, 아내 변동림은 최상 최선의 목표라는 이상(理想)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들었다. 그런데 이상의 친구 구본웅의 조카인 구광모 중앙대 교수의 회고글(‘友人像’과 ‘女人像-구본웅, 이상, 나혜석의 우정과 예술’, 신동아 2002.11.01)을 보면 또 다르다.
이상이 살았던 큰아버지 집터, 2004년 5월. |
1927년 3월에 보성고보를 졸업한 이상은 현재의 서울대 공대 전신인 경성고등공업학교 건축과에 입학했다. 축하선물로 구본웅은 숙부에게 받은 사생상(스케치박스)을 이상에게 주었는데, 이상은 비로소 제대로 그림을 그리게 되었다며 감사의 표시로 자기 아호에 사생상의 ‘상자’를 의미하는 ‘상(箱)’자를 넣겠다고 했다. 호의 첫 자는 나무 목(木)자가 들어간 성씨 중에서 이씨를 골라 ‘李箱(이상)’이라며 즐거워하고, 구본웅에게는 이를 비밀로 해달라고 요청했다.
구본웅은 이상과의 약속대로 침묵했으나 숙모에게만은 사실대로 이야기했는데, 그 숙부와 숙모가 구광모의 할아버지이고 할머니다. 이상이라는 필명은 1934년 ‘건축무한육면각체의 비밀’에서 처음 쓰였다는 것이 정설이었으나, 1972년에 경성공업 제8회 졸업생 앨범에 이상이라는 아호가 적혀 있는 것이 발견되었다.
이상이 살았던 집터(2010년 3월). 4월 6일 이곳에 ‘이상의 집’이 문을 열었다. |
그는 서울 종로구 사직동 언저리에서 태어나서 통인동 큰집의 양자가 되어, 누상동 신명학교에 다니다가 수송동 보성학교를 졸업하고 동숭동 서울대 자리에 있었던 경성고공에 다녔다. 졸업 후 총독부에 취직이 되었으나 몇 년 안 되어 때려치우고, 황해도 백천에 요양 가서 만난 금홍이와 통인동 집을 담보로 돈을 얻어 종로 2가에 제비다방을 차렸다가 돈만 날린다. 아픈 몸을 요양하고자 시골로 가서는 ‘권태’를 느끼고 동경으로 ‘망명’ 가서는 철저한 이방인이 되어 골방에 처박혀 있다가 잠깐의 산보로 잡혀 감옥에 갇힌다.
아무도 받아주지 않았던 그의 물리적 자취도 점점 지워지고 있다. 그가 태어난 사직동 집 자리는 어딘지 모르고, 누상동에 있던 신명학교는 자취도 없고, 견지동에 있던 동광학교도 찾을 수 없고, 보성학교는 조계사가 되었고, 한국에서 마지막으로 머물렀던 수하동 즉 지금의 을지로 1가 외환은행 맞은 편 뒷골목에 있는 일본식 저층 아파트 자리는 ‘통으로 개발’되어 몇 개의 큰 건물로 치환되어 버렸다.
특히 제비다방 자리는 사람들이 애타게 찾지만 정확한 위치를 모른다. 아마도 종로 44번지, 제일은행에서 광화문 방향으로 현재 종로1가에서 한창 재개발이 진행 중인 지역이 아닐까 싶다. 통속잡지로 유명했던 ‘삼천리’(1934.5.1, 제6권 제5호)의 ‘끽다점 평판기’라는 글에 의하면, 제비다방은 “총독부에 건축기사로도 오래 다닌 고등공업 출신의 김해경씨가 경영하는 것으로 종로서 서대문 가느라면 10여 집 가서 우편(右便) 페-부멘트 엽헤 나일강반(江畔)의 유객선(遊客船)가치 운치 잇게 빗겨 선 집”이었다.
서울 통인동 154-10번지 ‘이상의 집’(2011년 4월). |
당시 시내의 끽다점(喫茶店), 즉 다방으로서 카운터에 미모의 여인이 앉은 곳은 종로 보신각 근처 ‘뽄·아미’와 이상이 경영했던 청진동 제비다방뿐이었다.
제비다방은 조선광업소 1층에 사글세로 들어갔는데, 종로 대로변 1층이니 자리는 좋았으나 결국 2년2개월 만에 운영난으로 문을 닫았다.
엘리트 코스를 마쳤으나 건강 문제로 건축가로 살지 못하고, 연이은 다방사업 실패로 돈도 벌지 못하고, 2000여편에서 고르고 고른 30여편의 시조차 신문에 절반밖에 연재하지 못한 이상의 연이은 좌절은 그를 깊은 어둠 속으로 몰아넣는다.
“처심은 재떨이를 버리듯이 대문 밖으로 나를 쫓고/ 완전한 공허를 시험하듯이 한마디 노크를 내 옷깃에 남기고/ 그리고 조인이 끝난 듯이 빗장을 미끄러뜨리는 소리/ 여러 번 굽은 골목이 담장이 좌우 못 보는 내 아픈 마음에 부딪혀/ 달은 밝은데/ 그때부터 가까운 길을 일부러 멀리 걷는 버릇을 배웠더니라.”(시 ‘무제2’ 중에서)
이상은 어두운 방이다
이상이 가장 오래 살았던 곳은 통인동의 큰집이다. 이상은 큰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집을 팔아 큰어머니와 나누어 갖고 본가의 식구들과 효자동 근처에 초가집을 얻어 23년 만에 다시 모인다. 그러나 그는 그 집에서 2주 정도 살다가 금홍이와 제비다방을 차려 나왔다.
“…그렇건만 나는 돈을 벌 줄 모릅니다. 어떻게 하면 돈을 버나요, 못법니다, 못법니다. 동무도 없어졌습니다. 내게는 어른도 없습니다. 버릇도 없습니다. 뚝심도 없습니다. (중략)…어느 날이고 밤 깊이 너희들이 잠든 틈을 타서 살짝 망하리라. 그 생각이 하나 적혀 있을 뿐입니다. 우리 어머니 아버지께는 고하지 않고 우리 친구들께는 전화 걸지 않고 기아 하듯이 망하렵니다. 하하, 비가 오시기 시작입니다. …이렇듯 궂은비가 오는 밤에는 우는 사람들이 많을 것입니다….”(‘슬픈 이야기-어떤 두 주일 동안’ 중에서)
금홍과 이상은 우미관 근방 골목 안 일각대문 집에 방방이 수십 가구가 사는 집에서 방 두 개를 얻어 각자 독립된 생활을 하는데, 이것이 ‘날개’의 소재가 되는 기둥서방의 생활이다.
그러다가 어느 날 홀연히 금홍은 또 집을 나갔고, 이상은 다시 ‘도스토예프스키의 방’이라 불린 제비 뒷방으로 홀로 돌아왔다.
서울대 공대 전신인 경성고등공업학교 재학 시절의 이상. |
시인 김기림의 회고(‘고 이상의 추억’, 조광 1937.6)에 의하면, 이상을 찾아간 꼬부라진 뒷골목 이층 골방은 완전히 햇빛이 들지 않는 방이었다.
“날개가 아주 부러져 이불을 둘러쓴” 전등불에 가로비친 그의 얼굴은 상아보다도 더 창백하고 검은 수염이 코밑과 턱에 참혹하게 무성했다. 당시 이상은 ‘날개’의 평에 예민했고, 김기림은 세상이야 알아주든 말든 값있는 일만 정성껏 하다가 가면 그만이 아니냐 하고 어색하게나마 위로한다.
이상의 동생 김옥희가 기억하는 오빠의 방 또한 늘 지저분하고 퀴퀴한 냄새가 나서 집안 식구가 별로 드나들지도 않았는데, 오빠가 방을 비우면 그때야 겨우 들어가 방을 치우곤 했을 뿐이라고 한다.
“해가 들지 않는다. 해가 드는 것을 그들이 모른 체하는 까닭이다. …나는 어디까지든지 내 방이-집이 아니다. 집은 없다-마음에 들었다. …이 이상으로 밝거나 이 이상으로 아늑한 방은 원하지 않았다. 내 방은 나 하나를 위하여 요만한 정도를 꾸준히 지키는 것 같아 늘 내 방에 감사하였고, 나는 또 이런 방을 위하여 이 세상에 태어난 것만 같아서 즐거웠다…”(‘날개’ 중에서)
이상과 그의 시 ‘무제2’를 모티브로 한 스케치. |
이상은 변동림과 결혼한 지 몇 개월 되지 않아 혼자 동경으로 떠난다. 그러나 동경에서도 아무도 그를 알아주지 않았고 아무런 희망도 없었다. 그는 초라한 민박에 기거하며, 마치 모두 멎어버린 유령의 도시에 홀로 괴괴하게 걸어가는 자코메티의 조상을 닮은 영혼으로 떠돌다가 경찰에 붙잡혀 감방에 34일간 있다가 나오는 바람에 폐병이 도져서 세상을 떠난다. 변동림이 그 유해를 거두어 돌아와 미아리에 안장했으나, 지금은 그곳이 어디인지 알 길이 없다.
십여 년 전 통의동에 살던 때, 우리 아이들이 길 건너 통인동으로 태권도를 배우러 다녔다. 그 골목길에 아이들을 데려다주며 자주 들락거리던 ‘호돌이책방’이란 도서대여점이 있었는데, 마당을 지붕으로 덮어 실내로 개조하여 볕이 잘 들지 않는 침울한 북향집이었다. 그 앞은 예전에 물길이었던 좁은 골목길로 늘 차들이 들락거리며 복잡했다. 그곳이 바로 이상이 살던 통인동 150번지 일대의 집터였다는 걸 한참 후에야 알았다.
이상이 집을 판 이후 필지가 더 나뉘고 새로 집이 지어져 생판 다른 집이 들어서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이상의 집’이 논란이 되어 한동안 많은 이야기가 떠돌다가, 몇몇이 뜻을 모아 사들여 이상 기념관을 짓겠다는 야심찬 계획을 세우고 있다 한다. 집이라 봐야 손바닥 하나로 다 가릴 정도로 아주 작은 집이고, 역사적·정서적·사료적·감상적 가치가 전무하므로 헐어버린다는 것이다.
4월 6일 통인동 154-10에 ‘이상의 집’이 문을 열었다. 두 달간의 이별의식을 마치면 집은 말끔히 없어지게 된다. 이상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이상의 집’은 사람들을 무릎께에 잔뜩 부려놓고, 머리에는 무언가 조롱이 가득 담긴 파편화된 문자를 얹고 앉아서 하늘을 보고 있었다.
나는 그 집이 가장 잘 보이는 맞은편 미용실 계단에 서서 그 집을 한참 바라보며, 마치 큰집에 양자로 들어가서 재취로 들어온 큰어머니와 큰어머니의 아들 문경과 큰아버지, 네 식구가 섞이지 않고 살던, 컴컴한 방에서 퀴퀴하게 누워 있던 이상과도 닮아 있다는 생각을 문득 했다. 사람들은 까르르 부서지는 소리를 내며 매장을 끝내고 즐겁게 소풍준비를 하는 그레고르 잠자(카프카의 ‘변신’의 주인공)의 가족들처럼 화사하게 기념촬영을 하고 있었고, 집은 의미로부터 해방된 몸짓을 하고 있었다.
“…나는 밤 속에 들어서서 제웅처럼 자꾸만 감해져 간다/ 식구야 봉한 창 어디라도 터놓아다고/ 내가 수입되어 들어가야 하지 않나…”(시 ‘가정’ 중에서)
가온건축 공동대표 이야기로 집을 짓다’ 공동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