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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형철의 시네 리뷰] 제인 에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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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세한 연출 치밀한 구성… 원작의 묘미 가장 잘 살려
가끔 ‘원작을 뛰어넘은 영화’라는 요란한 광고카피들을 본다. 그런데 말은 바로 하자. 간단히 말해 소설과 영화는 다르다. 원작을 뛰어넘은 게 아니라 원작소설과는 다른 영화가 된 것이다. 같은 장르를 리메이크한 것이면 또 모를까. 원작소설을 뛰어넘은 영화라는 게 과연 존재하기나 한 걸까.

캐리 후쿠나가 감독의 ‘제인 에어’를 보고 나서 예고편을 찾아본다. 예감 적중. 어김없이 ‘원작을 뛰어넘은 새로운 제인 에어를 만나다!’라는 문구가 나온다.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서 원작 소설의 무대와 수만 리 떨어진 한반도 어느 바닷가 자그마한 집 다락방에 세계문학전집으로 꽂혀 있던 샬롯 브론테의 ‘제인 에어’를 읽은 한 소년이, 이제 어른이 되어 그 유명한 원작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을 본다. 하지만 영화의 어떤 면이 원작을 뛰어넘었다는 것인지 도무지 알 길이 없다. 새로운 제인 에어는 만날 수 있었는지 몰라도 말이다.

아니다. 새로울 수는 있어도 혹은 원작에 극진히 충실하여 원작을 한껏 잘 살려내거나 원작을 그럴듯하게 재해석할 수는 있어도, 한 시대는 물론이고 이미 오래전에 고전의 반열에 든, 그것도 소녀 취향을 극도로 싫어했던 한 소년에게도 뭔지 모를 떨림을 선사한 작품을 어떻게 뛰어넘는다는 말인가. 그럴 수는 없는 일이다. 제 아무리 대단한 영화가 나오더라도 소설 ‘제인 에어’와는 결국 맛이 다르다. 그 풍부한 맛을 뛰어넘을 수는 없다.

그렇지만 캐리 후쿠나가의 ‘제인 에어’가 그동안 영화화된 ‘제인 에어’ 중에 원작의 묘미를 가장 잘 살려낸 영화라는 세평에 이견을 달 생각은 없다. 연출은 섬세하고 구성도 치밀하다. 배우들의 연기도 수준급이다. 팀 버튼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신묘한 분위기를 남겼던 미아 바시코프스카는 꽤나 인상적인 제인 에어를 보여준다. 마이클 파스벤더는 프랑코 제페렐리 감독의 ‘제인 에어(1996)’에서 로체스터 역을 연기한 윌리엄 허트와는 확연히 다른 느낌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개성 넘치는 캐릭터를 소화해 낸 주디 덴치는 가장 기억에 남을 페어팩스를 연기했다. 재미있는 것은 세인트 존 리버스 역으로 나오는 제이미 벨인데 어디서 많이 봤다 싶었더니 ‘빌리 엘리어트’의 그 빌리다.

말이 나왔으니, 프랑코 제페렐리 감독의 ‘제인 에어’와 이 영화를 잠시 비교해 보자. 소설의 흐름에 맞춰 순방향으로 진행되는 제페렐리 판 ‘제인 에어’와는 달리 이 영화는 프롤로그부터 폭풍우를 뚫고 어디론가 달려가는 제인의 모습으로 시작한다. 이룰 수 없는 사랑과 운명에 절망한 채 손필드 성을 뛰쳐나온 제인이다. 강렬하다. 절망의 순간에도 이 여성의 움직임에는 뭔가 꿈틀거림이 있다. 자신의 운명에 맞선, 가녀리지만 당당한 모습의 이 여성이 바로 이 영화가 그리는 제인 에어라고 미리 선언하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세인트 존 리버스를 처음부터 등장시키고 곧 이어 학대받는 제인의 어린 시절과 이어붙인 구성은 아무래도 억압적인 기독교 윤리에 대한 강한 풍자라는 인상을 심어준다. 제페렐리 판에 비해 어린 제인을 훨씬 압축적이고 비약적으로 상징화한 점도 두드러진다. 원작을 충실히 구현하면서도 원작의 내용에 익숙한 수많은 관객들에게 새로운 정서를 환기하는 영화적 장치를 적재적소에 배치한다. 멜로의 전형적인 틀을 그대로 유지하면서도 인물의 캐릭터에 새로운 기운을 불어넣어 늘어짐이나 진부함을 피해간다. 생기 없고 약간은 병적인 느낌이 강했던 제페렐리 판 샬롯 갱스부르(제인 에어 역)에 비해 부드러우면서도 더 단단하고 오묘한 매력을 느끼게 하는 미아 바시코프스카가 훨씬 현대적이다. 마이클 파스벤더가 연기한 로체스터도 더 위악스럽고 열정적이다. 원작에서 강인한 인상을 남긴 대사들도 적절한 장면에서 빛난다.

하지만 인생의 어느 한 시기에 세계고전명작 ‘제인 에어’를 만났던 그 강렬한 순간을 아직도 마음에 품고 있는 관객들이라면 아무리 이러저러한 말을 갖다 붙여도 이 영화에 만족할 수는 없을 것이다. 어쩌면 그것은 인습과 장벽을 넘어 숙명 같은 사랑을 끝까지 지켜낸 ‘제인 에어’가 가르쳐 준 학습효과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더 결정적인 이유는 앞으로도 수없이 만들어질 영화, ‘제인 에어’를 훨씬 뛰어넘은 원작소설이 이미 존재하기 때문이다. 샬롯 브론테의 ‘제인 에어’ 말이다.

교사·영화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