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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현칼럼] 외팔이 학자, 외팔이 국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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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시장적 규제 발상은 정답 아니다
국회는 주택 3법 처리 왜 막은 건가
파블로프의 개를 빼닮은 것인가. 민생 현안이 불거지면 정치권은 반사적으로 반응하기 일쑤다. 전셋값이 치솟으면 ‘임대료 규제’를, 집값이 요동치면 ‘분양가 상한제’를 들먹인다. 늘 공염불만 하는 게 아니다. 때론 국회 입법권을 발동해 행정부에 규제의 칼을 쥐여준다. 분양가 상한제가 그 과정을 거쳐 현재 조자룡의 헌칼 노릇을 하는 중이다.

정치권의 선의를 의심할 일은 아니지만 문제는 규제 만능 철학을 반영하는 헌칼이 민생을 제대로 보살피느냐 여부다. 경제 논리상 긍정이 쉽지 않으니 탈이다. 왜 그런가. 유럽 일각에서 실행되는 임대료 규제 문제를 먼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이승현 논설실장
스웨덴 출신의 1974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 군나르 뮈르달은 임대료 규제를 사갈시했다. 이렇게 말했다. “어떤 도시를 철저하게 파괴하는 방법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원자폭탄 투하, 다른 하나는 집세 동결이다.”

사회구성원의 이해가 충돌하는 정책 수단에 대해 칼로 무 자르듯 단언하는 경제학자는 기실 많지 않다. 특히 국정책임자에게 정책 조언을 하는 입장에선 빠져나갈 구멍을 곁눈질하며 모호하게 발언하게 마련이다. 우스갯소리도 허다하다.

미국의 33대 대통령 해리 트루먼은 “외팔이 경제학자가 보고 싶다”고 푸념했다고 한다. 백악관 안팎의 전문가들이 대체로 “한편으론(on the one hand) 어떻고, 다른 한편으론(on the other hand) 어떻다”고 조언한 까닭이다. 불만을 터뜨린 미 대통령은 트루먼만이 아니다. 레이건은 “경제학자들에게 100가지 질문을 던지면 3000가지 답변이 나올 것”이라고 했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뮈르달은 매우 이채롭다. ‘외팔이 경제학자’를 자처한 셈이다. 그렇다고 놀랄 일은 아니다. 뮈르달은 경제학계의 상식을 웅변했을 따름이니까.

흥미로운 통계가 있다. 92년 미국경제학회 회원들을 대상으로 실시된 설문조사 결과다. 저마다 딴소리를 하는 경제학자들 사이에 의견 일치가 가능한 사안이 있기는 한지 알아보려는 취지의 조사였다. 당시 일치율 1위에 오른 것은 ‘주택 임대료 규제는 주택의 수량, 품질의 저하를 가져온다’는 명제였다. 근 94%의 회원이 ‘그렇다’고 긍정했다. 반시장적 규제 발상으론 세입자에게 해만 입힌다는 컨센서스가 존재하는 셈이다.

분양가 상한제 문제로 돌아오자. 이 헌칼의 효용은 어떤가. 결론은 뻔하다. 논리적으로 임대료 규제와 다를 바 없는 까닭이다. 경제학계는 대체로 반기를 든다고 봐도 무방하다. 주거난을 덜고 민생을 보살피는 답안과는 거리가 먼 것이다.

정부가 그제 ‘5·1 건설 대책’을 발표했다. 3·22 대책을 잇는 올해 4번째 긴급처방이다. 건설·금융권의 책임을 묻기보다는 선심책 열거에 급급한 감이 없지 않다. 비판을 받더라도 연쇄 부도 공포를 좌시할 수 없다는 고심의 흔적이 역력하다. 그런데도 시장은 냉랭하다. “획기적 방안이 없다”는 쓴소리도 들린다.

정부는 속이 뒤집힐 것이다. 국민에게 부담이 전가될 ‘종합선물세트’가 아니라 시장 기능 복원에 초점을 맞춘 상식적 대책이 요구된다는 점을 왜 모르겠는가. 잘 알기에 4월 국회에서 분양가 상한제 폐지를 골자로 한 ‘주택 3법’ 처리를 위해 안간힘을 썼다. 결과는 허탕이다. 이 바람에 3·22 대책도 바람 빠진 풍선 꼴이 됐다. 여야가 입씨름만 벌인 탓이다.

뮈르달이 ‘외팔이 학자’라면 대한민국 국회는 ‘외팔이 국회’다. 방향은 정반대이지만 소신은 양쪽 다 돋보인다. 국회는, 특히 야당은 주택 3법 처리 저지에 성공한 만큼 소신의 근거를 국민이 알아듣게 설명해줄 필요가 있다. ‘상한제를 풀면 집값이 오를까봐’ 식의 단세포적 주장 말고 경제 상식에 부합하게 말이다.

건설·금융권 관계자가 아니더라도 국회가 왜 줄도산 위기감이 감도는 비상시국에 옛 무협영화 주인공처럼 ‘돌아온 외팔이’ 행색을 고집하는지 궁금해하는 사람이 제법 많다. 이제 답해야 한다. 국회에 경제 문외한이 많아서인가. 아니면 ‘시장 실패’ 혹은 ‘정부 실패’를 간절히 원해서인가.

이승현 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