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메뉴 보기 검색

사랑을 기억하고 싶은 여자… 냉정하고 무관심한 남자

사랑할 때 세세한 것들까지 기억하는 여자와
소중했던 것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남자의 특성을 해부하듯 극명하게 대비
‘사랑을 카피하다’는 사랑할 때 세세한 것들까지 기억하는 ‘여자’와 소중했던 것조차 기억하지 못하는 ‘남자’의 특성을 해부하듯 극명하게 대비해 보여주는 작품이다. 사랑을 기억하고 싶은 ‘여자’와 사랑에 무관심한 ‘남자’가 만난다. 여자는 로맨틱하고 감성적이며 남자는 냉정하고 이성적이다. 영화는 여자와 남자 가운데 어느 한 쪽이 맞다고 편드는 게 아니라 양쪽 입장과 생각을 잘 설명하면서 여자와 남자가 가진 다른 부분, 다른 생각, 다른 본능 등을 제대로 짚어내고 있다.

‘내 친구의 집은 어디인가’ ‘올리브 나무 사이로’ ‘체리 향기’ ‘바람이 우리를 데려다 주리라’ 등으로 국내 팬들에게도 익숙한 이란의 거장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감독이 모국 이란을 떠나 이탈리아 투스카니 지방을 배경으로 연출한 작품이다. 거장은 처음으로 남녀 간의 ‘사랑’을 명확히 드러낸 러브스토리를 선보인다. 영화의 구조는 간단하지만 남녀의 대화와 그들의 관계 속에 진실과 거짓이라는 주제를 숨겨놓았다. 영화가 진행될수록 관객들은 어떤 것이 진실이고 거짓인지 구분하기 어려워지지만 그와 동시에 그들의 감정 속으로 깊이 빠져들게 된다.

관광엽서 속 사진처럼 가로수가 아름답게 늘어선 길을 드라이브하는 장면에서는 관객이 직접 운전대를 잡고 주행하는 듯한 쾌감을 맛볼 수 있다.

드라이브 도중 들어간 카페의 여주인이 두 남녀를 부부로 오해하면서부터 이들은 부부인 척하는 역할극을 시작한다. 역할극은 급속히 진전되어 마치 어려운 결혼생활의 극심한 고통을 겪고 있는 부부처럼 티격태격 해댄다. 도대체 이 두 사람은 어떤 관계일까? 역할극을 하면서 서로 환심을 사려는 조금 괴상한 취향을 지닌 초면의 두 사람일까, 아니면 서로에게 무관심해진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역할극을 하는 오래된 커플일까? 

영화가 객석의 마음을 쓸어가는 부분은 부부인 척 행세하는 두 배우의 연기가 너무나 뛰어나서 그들이 시종 벌이는 중년부부의 흔한 말다툼이 사실적으로 다가오는 대목이다.

“화장실에서 나와 보니 당신은 쿨쿨 자고 있더군요. 15주년 기념일인데…. 베개를 움직여 깨워보려 하니 도로 곯아떨어지더군요.”

“여보, 난 피곤했어. 얼마나 피곤했으면 잠들었을까를 걱정했어야지.”

“나도 피곤한 사람이에요. 왜 더 이상 나를 사랑하지 않죠?”

“15년이나 지났어. 우리가 신혼부부 같아? 물론 아직도 사랑해. 표현방법이 다른 거지. 왜 그걸 이해 못 해? 뻔한 것 설명해주기도 이젠 지쳤어.”

감독은 영화를 끝까지 본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는 특별한 코드를 영화 속에 장치해 두고, 어느 샌가 관객 모두를 끌어들인 뒤 영화 속 두 사람이 택할 사랑의 행로를 함께 고민하게 만든다.

쥘리에트 비노슈가 왜 명실공히 세계가 인정하는 명품배우인지 진가를 알게 하는 작품이다. 비노슈는 립스틱을 바르고 귀걸이를 했는데도 이를 알아봐주지 못하는 연인에 대한 불만을 몸짓과 목소리에 가득 담아 표현한다. 그녀는 15년 동안 아내 노릇을 제대로 했을까? 그는 그녀를 원하는 것일까? 그는 그녀를 알기나 할까? 이러한 물음은 비노슈의 완벽한 연기가 만들어낸 의문들이다. 언제나 빈 틈을 허락하지 않고 감정선을 제어하는 그녀의 ‘빛나는 순간’을 이 영화에서 만나 볼 수 있다.

비노슈는 이 작품으로 지난해 칸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을 거머쥐며 세계 3대 영화제를 모두 석권했다. 1993년 크시슈토프 키에실로프스키 감독의 세가지 색 시리즈 1편인 ‘블루’로 베니스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을 받은 데 이어 1997년 ‘잉글리쉬 페이션트’로 베를린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바 있다.

김신성 기자  sskim65@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