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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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동네 산책] 가난한 어머니의 노동에 매달려 있는 아들의 면학

성적이 떨어지거나 납부금을 못 내면 불려나오던 가난한 시절의 엄마처럼, 사회가 각박해지면 누군가는 꼭 ‘가족’이라는 걸 불러내곤 했다. 100만부가 넘게 팔린 ‘아버지’라는 소설 역시 가족을 간절하게 호명하던 불안한 시대와 연관이 있었다는 사실은 환기할 필요도 없다.

그 무렵 ‘고개 숙인 아버지’들에 대한 열띤 관심과, 금붙이를 챙겨서 나라 경제를 살리는 데 도움이 될까봐 줄을 서던 행렬 사이에 혹시 어떤 연관이 없을까 궁금했던 기억이 있다. 

강경미 도서출판 꾸리에 대표
OECD(경제협력개발기구)에 가입한 선진국이 왜 하루아침에 그런 몰골이 되었는지 서슬 퍼런 추궁도 해보지 못한 채 ‘아버지’들이 무더기로 쫓겨나는 사태를 보면서 의문은 더 커졌다. 우리가 자신의 처지를 열심히 ‘가족 프리즘’ 안에서 소화해 내려고 애쓰면서 국가를 하나의 커다란 가족공동체로 상상하는 동안 정작 책임져야 할 사람들은 슬그머니 면죄부를 챙겨 달아난 것이 아닌가 하고 말이다.

한번 사라지고 나면 다시 희망을 갖는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실감해야 하는 시절이 지속됐다. 심야에 대리운전사로 나선 ‘아버지’들의 수가 부쩍 많아지는 걸 보면서 나는 곧 ‘어머니’가 불려나올 때가 됐다는 예감이 들곤 했다. 아니나 다를까. 어느 날 버스에서 나는 ‘엄마를 부탁해’라는 커다란 책 광고를 보게 됐다.

따지고 보면, 이건 이 나라의 ‘어머니’들에 대한 때늦은 대접이라는 생각도 없지 않았다. ‘아버지’들이 고개 숙이기 전에 먼저 일터에서 쫓겨났던 것은 ‘어머니’들이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이 점에 대해선 굳이 1998년 현대자동차노조 파업 때 가장 먼저 해고된 것이 ‘식당아줌마’들이었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투명인간’이란 말이 자주 눈에 띄기 시작했다. 이 ‘투명인간’은 판타지에 등장하는 근사한 존재가 아니다. 하루아침에 일자리를 잃고는 밤거리의 유령처럼 헤매거나, ‘시급 4000원’짜리 불안정한 노동으로 살아가야 하는 빈곤층을 일컫는 말이다. 이들은 하나같이 “마치 존재하지 않는 자처럼 존재해야 한다”고 명령을 받는 존재들이다. 일상어로 바꾸자면 “절대로 고객의 눈에 띄거나 불편을 주지 말라”는 지시이다. 이들이 ‘투명인간’인 덕에 남자들은 화장실에서 걸레질을 하는 아주머니들이 들어와도 보던 볼일을 별 불편 없이 볼 수 있는 것이다.

방송인 김미화씨가 “나의 엄마는 화장실 청소부 아줌마였다”고 말한 적이 있다. 볼일을 보는 사람이 있건 없건 화장실 한구석에서 식은 밥을 먹던 자신의 엄마를 굳이 그가 상기한 까닭은, 작년 겨울 홍익대 청소노동자들의 농성소동 때문이었다. ‘투명인간’들도 찌르면 아픈 법이다. 나도 그 덕에 그이들의 하루 점심값이 300원이란 사실을 알게 됐다. 그러나 무엇보다 눈길을 끌었던 것은 그 대학 학생대표들이 “면학 분위기를 해친다”고 아줌마들을 타박하던 장면이었다. 내 눈에는 바로 이 장면이 이 땅의 가난한 어머니와 자식들이 만나는 장면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아들의 면학과 어머니의 부끄러운 노동이 맞대결하고 있는 장면 자체가 낯선 것은 아니었다. 달라진 것은 어머니의 노동 끝에 어렵게 매달려 있는 아이들의 면학도 결코 자신들을 구할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한 청소부 아주머니는 평소 아들에게 이런 자리엔 얼씬거리지 못하게 했다고 한다. 이 어머니는 영화 ‘마더’의 대사처럼 “아무도 믿지 마, 내가 구해줄게”라고 말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그러나 어머니의 노동은 아들을 가난에서 구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절망이 아직 제대로 말해지지 않은 채 이 순간 허공에 매달려 있다. 이 절박한 상황이 증발된 문학에 이 시대의 엄마를 부탁할 수 있을까.

강경미 도서출판 꾸리에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