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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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경마 100년사… 나귀경주에서 말 산업법까지

우리나라에 서구식 경마가 도입된 지 백년이라는 세월이 흘러왔다. 한국경마는 근현대사 속에서 우리민족의 희로애락을 함께 해왔으며 현재도 매년 2000만 명 이상의 고객이 경마공원을 찾는 인기스포츠가 됐다. 경마의 날을 맞아 지난 100년간의 한국경마의 발자취를 되짚어 보면서 앞으로 나아갈 방향을 조명해 보도록 하겠다.

◇ 한국 경마의 태동

우리나라의 서구식 경마는 1898년 5월 28일 구 동대문운동장 자리인 훈련원 광장에서 개최되었던 관립 외국어학교 연합운동회의 나귀경주에서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다. 그 후 1914년 4월 3일 조선공론사가 주최한 조선경마대회가 용산 구연병장에서 열렸는데 이것이 대중에게 첫 선을 보인 우리나라 최초의 경마라고 할 수 있다. 조선경마대회는 10만 명의 인파가 운집할 정도의 대성황을 이루었으나 마권발매가 배제된 축제행사와 같은 경마로, 개화기의 새로운 풍물로서 경마를 소개하는 수준에 그쳤고 경마붐을 일으키지는 못했다.

그 후 민간에 의해 꾸준히 개최되어 오던 경마대회는 1922년 4월 5일 사단법인 조선경마구락부가 설립되면서 대한민국 최초로 공식적인 경마시행 법인이 탄생했고 같은 해 5월 20일 첫 공식 경마대회를 개최해 이 날을 ‘경마의 날’로 기념하고 있다. 이 후 1923년 승마투표제도가 공인되면서 경마는 전국으로 확산되어 1925년∼1926년에는 주요 도시에서 경마대회를 개최하지 않는 곳이 없었을 정도였다. 1920년대 말 전국 지방도시의 경마구락부의 수는 20여개에 이르렀다.

1930년대에 들어서는 점차 한국인 경마팬이 늘어나기 시작했고 지식인층에서도 경마에 흥미를 가지는 사람이 생겼다. 시행일수와 관림인원도 꾸준히 증가해 1926년 1일평균 5295명에서 1931년에는 7359명으로 39%의 증가세를 보였다.

1933년 1월 1일 조선경마령이 시행되면서 모든 경마는 법규에 따라 시행되었으며, 법인 경마협회가 발족하면서 전국의 경마를 통제하게 되었는데 이때부터를 ‘공인경마시대’라고 한다. 공인시대로 접어든 경마는 해마다 성장을 거듭하였고 중일전쟁 이후에는 군정(軍政)과 마정(馬政) 후광까지 입어 1930년대 말에는 경마의 황금기를 구가하였다.

민간마사단체의 단일화를 꾀하던 조선총독부는 1942년 2월 14일 조선마사회령을 공포하면서 종래의 경마단체를 해산시키고 그 권리의무를 마사회가 승계하게 하였다. 같은 해 조선마권세령을 동시에 공포하면서 우리나라 경마에 처음으로 마권세를 부과하였다.

◇새 출발과 도약을 위한 준비

 8.15 광복 후 조선마사회의 일본 경영진은 평소 안면이 있던 한국 승마인들에게 마사회 인수를 부탁하였고, 이들은 조선마사회 인수단을 구성하여 미군정 당국의 승인을 얻게 되었다. 인수단은 회명을 한국마사회로 변경하고 인수단의 최고령자인 나명균이 초대 회장이 되어 경마시행을 준비하여 1945년 10월 20일, 당시 경마의 메카였던 신설동경마장에서 광복 후 첫 경마를 개최하였다. 

6·25 이전의 신설동 경마장
광복 직후 국내 주요인사였던 이승만, 김구, 신익희, 조소앙, 최동오, 조병옥 등은 신설동경마장을 자주 찾았고, 특히 백범 김구 선생은 주말이면 거의 빠지지 않고 경마장을 찾았다. 백범의 발길이 잦았던 것은 경마를 즐기기도 하였거니와 중국에서 타계한 모친(곽낙원·郭樂園)의 유골을 1946년 국내로 모셔와 안장할 때 기수들이 기마의장대로 호송을 맡아주는데 대한 감사의 뜻이 있었다. 요인들의 경마장 방문이 늘어나자 마사회 측에서는 이승만박사상 ,백범 김구상 등 특별경주를 실시하기도 하였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고 미군정이 폐지되면서 1949년 9월 29일 정부는 마사회의 명칭을 한국마사회로 공식 인가하고, 경마에 대한 감독을 강화하였다.

광복 후 꾸준한 성장세에 있던 한국 경마는 1950년 6.25전쟁의 발발로 치명적인 타격을 입게 되었고 1953년까지 약 4년간 긴 휴면기에 접어들게 되었다. 전쟁 중 신설동경마장이 비행장으로 징발 사용되면서 한국마사회는 경마재개를 위해 새 경마장 건설을 추진하게 되었고, 1954년 5월 8일에 뚝섬경마장을 개장하여 한국경마의 맥을 이어 가게 되었다. 1962년 1월 20일에는 한국마사회법이 제정·공포되면서 그동안 광복 후 15년이 지나도록 바꾸지 못했던 일본법의 잔재들을 정리할 수 있었다.

1960년대는 우리나라 경마가 처음으로 해외무대에 문을 두드리기 시작하였다. 우리나라 경마가 해외경마와 최초로 접촉한 것은 1966년 한일친선경마와 뒤이은 1968년 뚝섬경마장에서 개최된 국제친선경마(기수초청)였다. 1969년 3월에는 아시아경마회의(Asian Rscing Conference)에 가입신청을 하였고 이듬해 9월에 정식 ARC 회원국이 되었다.

덕마흥업이라는 민간회사와 마사회가 이원화하여 운영되던 경마운영체제가 1972년 마사회의 단일운영체제로 바뀌게 되었다. 이 후 국력의 비약적인 신장과 국민소득 수준의 향상에 따라 레저산업이 활기를 띠면서 경마도 급성장을 시작해 광복 후 경마의 주체성을 회복한 이래 30여년 만에 우리나라 경마는 비로소 성장궤도에 올라서게 되었다.

1980년 9월 서울에서 개최된 제15회 아시아경마회의(ARC)는 국내 경마사상 초유의 행사로 한국 경마의 성장을 해외에 널리 알림과 동시에 국력의 신장을 과시한 경마계의 큰 축제였다. 1984년에는 한국 경마의 해묵은 숙원사업이었던 발매, 환급 등 투표관리업무의 전산화에 돌입하게 됨으로써 경마 현대화의 새 장이 열리게 되었다.
경마를 관람하는 박정희 전 대통령
◇ 이제는 말 산업이다.

 1989년 9월 1일 경기도 과천의 35만평의 부지에 현대식 시설의 서울경마공원을 개장하면서 36년간 이어진 뚝섬경마장 시대를 마감하게 되었다. 이후 1993년에는 경마계의 숙원사업이었던 개인마주제를 도입하여 원활한 경마시행과 공정성을 강화하였고, 마필수급체계 개선과 국산마 육성의 기틀을 마련할 수 있었다.

1990년대에는 천연기념물 제347호로 지정된 제주 조랑말을 보존하기 위해 제주경마공원을 개장하였으며, 2005년에는 경마의 전국적 보급 및 질 향상을 위해 부산경남경마공원을 신설하여 현재의 3개 경마공원 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개인마주제 도입이후 한국경마는 계속적인 성장세를 보이면서 2010년에는 매출액 7조 5000억원, 입장인원 2100만명으로 세계 7위 수준으로 도약했다.

한국경마가 규모면에서 엄청난 성장을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2006년 바다이야기 사태 이후 사행산업에 대한 사회의 부정적인 인식이 강해지면서 경마의 사행성에 대한 사회적 비판이 커지게 되었고 2007년 사행산업통합감독위원회가 출범하면서 경마의 매출총량, 지점개설 등 경마사업 전반에 대한 규제가 강화되었다.

이러한 경마산업의 위기를 극복하고 경마를 포함한 말산업 전체에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고자 말산업육성법이 2009년 12월 국회에 제출되어 2011년 2월에 국회를 통과했다. 그동안 경마가 많은 국민들이 즐기는 레저스포츠임에도 대다수 국민들이 부정적으로 생각하게 된 것이 말에 대한 괴리감 때문이었다. 말산업육성법 통과는 국민들이 쉽게 말을 접하고 즐길 수 있는 제도적 기틀을 마련했다는데 매우 큰 의의를 가진다. 말산업육성법을 디딤돌로 하여 앞으로의 한국 경마가 전 국민에게 사랑받는 최고의 국민 스포츠로 거듭나기를 기원해본다.

김준영 기자 papenique@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