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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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동네 산책] 러시아인들의 독서 망중한

1995년 광복 50주년을 기념해 특집방송차 두만강가에 있는 러시아령 핫산(명칭의 유래는 下山이라는 우리 민족의 영역 지명에서 왔다고 함)에 갔을 때의 일이다. 전서구(傳書鳩:귀소본능을 살려 통신에 이용하는 비둘기)를 서울로 날려보낸 일이 있었다. 서울 비둘기를 ‘모신’ 현지 생활은 러시아인 소형승합차 운전기사에게 모든 과정을 의지하는 형태였다. 

노영환 SBS 제작본부부장(아나운서)
방송팀이 방송을 준비하는 동안 러시아인 운전기사는 한시도 벗어나지 않고 대기하는 등 성실한 근무 태도를 보여 감동을 받았다. 허름한 옷차림에 과묵한 그는 늘 문고판 책 한 권을 들고 망중한을 즐기곤 했다.

당시는 소련 붕괴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인지 러시아 국민 1인당 GNP는 바닥 수준이었다. 그런데도 작은 시골도시 어디를 가나 꽃을 파는 중년 여성들을 흔히 볼 수 있었다. 먹고사는 문제가 시급한데도 식탁이나 거실에 꽃 한송이 꽂는 여유가 그들에겐 있었다. 전력사정이 어려워 대부분의 가로등도 켜지 못하는 상태에서 예술공연을 하는 극장만은 가냘픈 불빛으로 위치를 알려주고 있었다. 비슷한 경험은 부산에서도 있었다. 부산항에 입항한 선원으로 여겨지는 러시아 사람이 탕 안에서 책 한 권을 읽으며 반신욕을 하고 있었다.

저변에 많은 독자를 지닌 국가에서 대문호가 나오는 것이 하등 이상한 일이 아닐 성싶다. 우리가 잘 아는 대부분의 러시아 문호들은 러시아 사람들이 아끼는 재산이자 존경의 대상이며 생활 속에 함께 살아가는 이웃이다. 그 문학성은 작가보다도 그 작가를 아끼고 사랑하며 작품을 읽고 음미해 주는 러시아 국민의 작품이나 다름없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우리 작가들을 제대로 읽고 평가하지 않는다면 누가 우리 문학을 아껴줄 것인가. 나 역시 세계 문학작품을 직접 통독한 경우보다 영화로 접한 비율이 더 많다는 것은 부끄럽기 짝이 없다. 요즘 어린이들의 독서도 전보다는 만화로 접하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그러다 보니 심오한 어휘의 표현력을 습독하기보다 간략한 줄거리만 기억에 남기 쉽다. 시험 준비 차원의 얇은 지식만 밑줄 그어 외워 놓은 경우라면 더더욱 우리 문학의 미래는 비관적이다.

노영환 SBS 제작본부부장(아나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