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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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동네 산책] 균형감 잃은 ‘당태종 평전’

중국인민출판사에서 펴낸 ‘당태종 평전’을 읽고 여러 가지 상념이 떠오른다. 당 고조 이연이 후계자로 봉한 태자(건성)와 아우를 죽이고(‘현무문의 변’) 정권을 잡은 이세민은 고구려와 여러 가지로 인연이 깊다. 이세민이 당시 고구려의 실세 연개소문과 천하를 놓고 쟁패한 사실은 잘 알려져 있다. 특히 고구려 원정에 실패해 병을 얻어 사망했다는 사실 또한 중국 정사들에 분명히 기록돼 있다. 그런데 평전에는 고구려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617쪽에 ‘당 태종의 건강이 나빠진 또 하나의 사건은 645년 고구려 정벌에 실패한 것으로, (중략)…’ 정도의 단 한 줄 언급돼 있을 뿐이다.

앞선 정권 수나라가 10여년에 걸쳐 세 차례나 고구려를 침공했으나 수백만 명의 희생자만 남긴 채 실패하고 그로 인한 반란으로 멸망하고 말았다. 고구려가 수·당 교체의 도화선이 된 것은 이세민 자신도 잘 알고 있을 터였다. 다시 말해 고구려에 대해 ‘철천지 원수’라는 대의명분을 내걸어 정복 사업의 깃발을 올렸을 것임은 자명하다. 그럼에도 평전은 상당 분량을 할애해 동돌궐, 토욕혼, 고창 등 서북변경 대외원정은 기술하면서 이세민의 평생 소원이었던 고구려 정복은 생략했다. 어딘가 균형감 잃은 역사 서술로 볼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짐작컨대 정복군주로서 대적할 만한 주변 세력들을 모두 무릎 꿇린 당태종 이세민이 고구려 따위에 패했다는 절망감과 상실감으로 크게 몸을 상했을 것이다. 이뿐만 아니라 고구려를 절대 건드리지 말라는 충신 위징의 말을 남기면서 죽었다. 그만큼 이세민에게는 고구려가 중요한 ‘대상’이었다는데도, 이 부분의 서술이 빠진 것은 저자의 학자적 양심을 의심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중국 정부는 20여 년에 걸쳐 관변학자들을 대거 동원, 만주에 퍼져 있는 고구려 흔적들을 지우는 데 열심이다. 수·당과 자웅을 겨뤘던 고구려를 한낱 지방정권으로 격하시키는 역사 왜곡을 서슴지 않고 있는 공산당 정부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길이 남길 인물 평전에 균형감 없이 서술하는 것은 역작에 흠집을 남기는 일이다.

중국인민출판사나 저자의 의도대로 책을 쓰는 것에 대해, 한국 독자들이 감놔라 배놔라고 할 수는 없으나 중국 사학자들 사이에 뿌리 깊은 고구려 멸시 태도가 엿보인다는 점에서 아쉽기만 하다.

정승욱 선임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