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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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객 뺏고 빼앗기’ 보조금 출혈경쟁 악순환

이통사, 끊이지 않는 ‘과징금 고리’
통신업계가 ‘과징금 철퇴’를 맞으면서도 불법을 멈추지 않는 것은 그만큼 생존 경쟁이 치열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통신시장에서 휴대전화 보조금은 ‘마약’으로 여겨진다. 당장 끊자니 고객을 빼앗기고 안 끊으면 수익을 갉아먹으며 경쟁력을 약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통신 3사 모두 보조금 경쟁을 하지 말아야 한다는 원론적인 입장에는 동의하지만 정작 고객 유치전이 벌어지면 상황은 달라진다.

신규 가입자가 줄고 번호이동으로 고객을 뺏기면 보조금을 투입하고, 경쟁사는 더 많은 보조금을 투입하며 맞선다. 악순환은 1997년 개인휴대통신(PCS) 사업이 도입된 이후 지금까지 반복되고 있다. 이로 인해 피해를 보는 것은 통신사만이 아니다. 보조금 규모가 커질수록 서비스 질 향상, 요금 인하의 여력은 줄고 피해는 고스란히 소비자에게 돌아올 수밖에 없다.

◆반복되는 과열 경쟁

SK텔레콤과 KT, LG유플러스는 마케팅 비용으로 한 해 수조원씩을 쓴다. 지난해에만 SK텔레콤은 2조9737억원, KT는 2조8263억원, LG유플러스는 1조6910억원을 썼다. SK텔레콤은 2002년 1조6230억원이었던 마케팅비가 10년 새 배 가까이 증가했지만 영업이익은 2조6837억원에서 2조350억원으로 오히려 줄었다.

LG유플러스도 같은 기간 마케팅 비용 증가율이 영업이익 증가율을 웃돌았다. KT 역시 상황이 다르지 않다.

통신업체 마케팅 비용은 광고비와 소비자에게 지급하는 단말기·통신요금 보조금, 휴대전화를 판매하는 대리점과 판매점에 지급하는 보조금 등으로 나뉜다. 이 가운데서도 보조금 비중이 가장 크다.

보조금 자체를 딱 잘라 나쁘다고 하기는 어렵다. 소비자들은 보조금 덕분에 그나마 조금이라도 싼 가격에 단말기를 구입할 수 있다. 하지만 통신업체의 보조금 정책에 따라 휴대전화 가격이 오르락내리락하면서 똑같은 전화기를 사면서도 남들보다 더 비싸게 사거나 보조금이 적은 휴대전화를 비싼 가격에 구입하게 될 수도 있다. 휴대전화 판매점들이 부가서비스를 끼워 팔거나 소비자에게 판매 가격을 속이는 행태가 나타나는 것도 보조금 제도에 기인한다.

보조금을 전제로 휴대전화 요금제가 설정되다 보니 정작 약정기간이 만료되고 공 단말기가 생겨도 소비자들은 비싼 요금제를 그대로 쓸 수밖에 없다. 소비자는 휴대전화 단말기를 오래 쓰면 쓸수록 손해를 보는 셈이다. 결국 현재의 보조금 제도는 통신업체에는 비용 부담을 증가시키고 소비자에게는 비싼 요금을 물도록 해 모두가 피해를 볼 수밖에 없는 구조인 셈이다.

통신업계 한 관계자는 “보조금이 줄면 요금을 더 내릴 수 있는 여지가 있는 건 사실”이라면서도 “보조금 외에 가입자 수 하락을 막을 마땅한 수단이 없는 게 문제”라고 말했다.

서비스와 기술 경쟁을 벌여야 한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단기 수익하락에 민감한 통신사로서는 ‘보조금’이라는 수단을 포기하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다.

◆정부 대책은 제자리

통신업계 보조금 경쟁을 막지 못한 데는 과징금 부과에만 급급한 정부 책임이 크다. 2000년 당시 정보통신부가 통신업체의 약관에 ‘보조금을 지급하지 않는다’는 내용을 명시하도록 하면서 잠시 사업자들이 요금 인하 경쟁을 벌이는 선순환 구조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하지만 얼마 못 가 통신업체가 대리점에 지급하는 지원금을 활용한 편법 보조금이 기승을 부리기 시작했다.

정부는 2003년부터 3년간 한시적으로 보조금을 금지하고 이를 어기면 통신업체 임직원을 3년 이하 징역에 처하거나 1억5000만원 이하 벌금형을 내리는 고강도 대책을 내놨다. 하지만 이마저 정치권의 논리에 밀려 5000만원 이하 벌금을 부과하는 것으로 후퇴했고 연이어 재고 단말기와 3세대(3G) 이동통신인 WCDMA 단말기에 대한 보조금을 인정하는 등 강력한 정책을 이어가지 못했다.

아이러니한 것은 보조금 금지기간 동안 통신업체 마케팅비가 오히려 늘어났다는 점이다. 얼마나 보조금 문제가 심각했던지 통신업체 스스로 ‘이동전화 공동시장감시단’을 발족해 정부가 해야 할 일을 대신하는 지경에 이르렀고, 업체 CEO가 “보조금을 강력 규제하라”며 목소리를 높였다.

방송통신위원회는 올해 통신업체에 보조금 지급과 관련해 과징금을 부과하며 다음 번 적발 시에는 영업정치 처분을 내리겠다는 뜻을 밝혔다. 이와 함께 이달 중으로 불법·편법 과징금 차단을 위한 ‘폰파라치’, 과태료 인상 등의 대책도 내놓기로 했다.

그러나 업계와 시민단체에서는 벌써부터 재탕·맹탕 정책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나온다. 논의되는 방안 중 하나인 불법 보조금 신고 시 포상금을 주는 ‘폰파라치’ 제도는 2006년 논의됐던 제도이고, 과태료 인상도 ‘보조금 전쟁’을 막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지적이다.

참여연대 안진걸 민생협력팀장은 “고객이 휴대전화를 직접 구입해 통신사에 구애받지 않고 개통할 수 있는 ‘블랙리스트제도’를 하루빨리 도입하는 등 유통구조를 투명화해야 한다”며 “단말기 가격을 현실화하고 통신업체들이 마케팅 비용을 대폭 줄여 요금인하에 쓸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라고 주문했다.

엄형준 기자 ting@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