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는 2000년간 이중언어 사회였고, 지난 60년간 한국 발전의 동력은 한국어였다. 하지만 한국 사회의 과장된 영어 프리미엄 때문에 공식어 자리를 영어에 내주며 한국어의 지위가 위협받고 있다. 국어학자가 아닌 영어학자가 이런 문제 제기를 했다는 사실이 눈길을 끈다. 영어학자 김미경(52·대덕대·사진) 교수가 그 주인공이다.
‘대한민국 대표 브랜드 한글’(2006)에 이어 ‘영어학자의 눈에 비친 한국어의 힘’(소명출판)을 낸 그는 “영어학자가 한국어의 중요성과 가치를 말하는 건 민족주의나 국수주의가 아니라 객관성과 보편성에 근거한 자기 긍정에 목마른 한국인 독자들을 위해서”라고 밝히고 있다.
그에 따르면 대한민국은 오랫동안 생활어는 언제나 한국어였지만, 공식어는 따로 있는 이중언어 시대였다. 조선시대까지는 한문이,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어, 미군정기에는 영어가 공식어였다.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과 함께 비로소 한국어는 공식어가 됐는데, 이는 언어 민주화가 이뤄진 중대 사건이다.
저자는 “지난 60년간 한국의 비약적인 발전이 가능했던 이유도 민중의 모어인 한국어를 공식어로 활용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즉 “모든 인간은 자신의 ‘모어’로 생각하고 창조한다. 번득이는 아이디어를 순간적으로 포착하고 발전시키는 데에도 모두 모어를 사용한다. 한국어는 민족어이기 이전에 한 국가의 공식어로서 국민의 법적인 권리를 보장하고 교육의 도구로 활용되며, 정보공유를 지원하는 민주화의 기본 도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문이 양반들의 기득권을 유지하는 중요한 수단이었던 조선시대 이중언어 체제의 문제는 영어점수가 높은 사람에게 사회적 혜택이 쏠리는 지금 상황과 다를 바 없다.
정신활동을 위한 도구로 모어의 힘을 환기하자는 저자는 2009년 국제학업성취도 평가(PISA) 결과를 인용한다. PISA에서 최상위에 오른 세 나라, 한국과 일본, 핀란드의 국민 교육 뒤에는 모국어의 힘이 있다고 분석한다. 높은 학업성취도는 국민 대부분이 자신의 모어로 교육을 받고 경제생활을 하고 있는 덕분이라는 것이다.
이와 반대로 영어공용어 사회의 불편한 현실도 확인된다. 모국어와 영어를 함께 쓰는 이중언어 사회가 되면 영어를 잘하게 될 거라는 기대는 책에 따르면 착각이다. 필리핀은 영어로 의사소통 가능한 인구가 7%, 인도에서 영어를 조금이라도 구사하는 인구는 10%에 불과하다. 싱가포르인들끼리만 이해할 수 있는 변종 영어 ‘싱글리시’를 구사하는 싱가포르는 또 어떤가. 미국의 언어학자 찰스 퍼거슨이 “한 사회에서 두 언어가 공용되는 경우 두 언어는 평등한 힘을 가질 수 없으며, 그 역할에 따라 필연적으로 상위어와 하위어로 차별된다”는 이론은 영어를 배우느라 한국어 능력이 갈수록 떨어지는 한국에도 적용될 수 있다.
영어 프리미엄과 영어 콤플렉스 때문에 사멸되다시피 한 제2외국어교육도 지적된다. “유럽인이나 아랍인, 중국인들을 설득시키고 감동시킬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언어는 영어가 아니라 그들의 모어라는 사실을 이해한다면 전 국민의 영어 획일화가 국제화에 큰 걸림돌”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영어 능력이 개인의 삶의 질로 연결되는 시대적 흐름을 나 홀로 외면할 수는 없을 터이다.
저자는 “전 국민을 대상으로 영어를 모국어화할 문제가 아니라 국제사회에서 경쟁할 지식인 그룹을 대상으로 해결해야 할 문제”라면서 “세계의 소식들을 모국어로 번역, 공유하는 ‘글로벌 보이스’를 활성화해 한국인들이 영어 실력과 상관없이 빠르게 세계 정보를 공유하고 민주적인 정보교환을 할 수 있는 환경을 정부와 지식인이 마련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김은진 기자 jisland@segye.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