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메뉴 보기 검색

[책동네 산책] 불행한 역사의 이정표로

사라지지 않는 유령처럼 우리 곁을 떠돕니다. 후련한 씻김굿판이라도 벌여야 했을 것을 그리 못했습니다. 정든 고국과 산천, 부모와 처자를 떠나 이국땅에 끌려와 돌아가지 못한 사람들, 결코 인간으로선 견딜 수 없는 열악한 환경에서 불귀의 객으로 목숨을 다한 그들…. 강제징용되었던 우리 조상의 사라진 삶이 기록과 기억으로 새롭게 되살아납니다. ‘바다를 넘는 100년의 기억’이 그 책입니다.

이수경 도쿄 가쿠게이대학교 교수
지금도 이름 없이 묻혀 있는 조선인 강제 징용자들의 희생과 죽음은 정확히 매듭지어지지 않고 있습니다. 직접 보고 듣지 않고서는 결코 절절히 느낄 수 없었던 그들의 고통…. 일제는 1939년부터 1945년에만 100여만명의 우리 형제자매들을 끌어갔고, 군속으로 37만명을 전선에 동원했습니다. 일본에서 활동 중인 교포 작가 김석범은 “과거사는 분명 해결되어야 한다”고 외쳤습니다.

윤정옥 정신대문제 대책협의회 초대 회장, 일본이 일으킨 전쟁으로 인생을 유린당한 강일출씨(1928년생), 송신도씨(1922년생), 김경봉씨(1922년생)의 ‘전쟁은 없어야 한다’고 호소하는 글은 우리 맘 속에서 몇 번이고 공명하고도 남습니다.

이 책은 일본 내 양심적 출판 저널로 유명한 ‘도서신문’이 2010년 한국 병탄 100년 기획 특집으로 1년간 연재했던 내용들을 정리하고 수정보완한 것입니다. 도서신문은 1937년에 도쿄 제국대학의 학보지로 출발했으나 중일전쟁 반대를 주장하다 쫓겨나, 지금껏 독립 저널리즘을 추구하는 독보적인 출판사죠. 그러나 어디까지나 어두운 과거의 잔영에 얽매일 수는 없다고 저자들은 호소합니다.

이 책은 특히 젊은 세대들의 한일 공생적 파트너십을 구축하기 위한 방법론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일본의 중견 시인 미야마 아키씨는 “우리가 과거의 아픔들이 미래에 반복되지 않도록 이 기록을 역사에 남겨야 한다”면서 “잊혀져 가는 불행의 역사를 이토록 기억하고 남겨서 내일의 이정표가 되어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강제 징용의 기록은 역사로서 보존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일본을 미워하는 데 그쳐선 미래의 발전이 없습니다. 새로운 동아시아의 미래를 구축하는 자세와 입장이 요구되는 시기입니다.

이수경 도쿄 가쿠게이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