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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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경제사 큰 족적…無에서 有를 일군 鐵의 사나이

1968년부터 포철 건설 본격화… 자본·기술 난관 딛고 최고 반열에
덩샤오핑, 日에 제철소 건설 부탁 때 “중국엔 박태준 없다” 반문 일화도
자본과 기술, 경험은 물론 부존자원마저 없던 1960년대 후반 우리나라가 일관제철소를 짓는다는 것은 무모한 도전이었다. 그러나 당시 박태준 포항제철 사장을 비롯한 임직원은 실패하면 모두 바닷물에 빠져 죽는다는 ‘우향우’ 정신으로 영일만에 종합제철소를 건설했고 잇달아 광양만에 세계 최신·최대 제철소를 세우는 데 성공했다. 사람들은 이를 ‘영일만과 광양만의 신화’라고 불렀다. ‘제철보국(製鐵報國)’의 신념으로 우리나라 철강산업을 세계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린 그가 13일 우리 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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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철강업계의 ‘신화 창조자’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은 우리나라 철강산업 선구자이자 세계적인 철강전문가로 이름을 떨쳤다. 철강왕이라 불린 미국의 카네기가 생애에 조강 1000만t 생산체제를 구축한 데 그쳤지만 박 명예회장은 창업 당대에 포항제철소와 광양제철소를 아울러 2100만t 생산체제를 구축해 세계 철강업계로부터 ‘신화창조자(Miracle-Maker)’라는 칭송을 받고 있다.

그의 좌우명은 ‘짧은 인생을 영원한 조국에’이다. 조국이 위태로울 때는 전쟁터에서, 국가 경제가 필요로 할 때는 산업현장에 몸을 던진 인물이다.

포스코와 인연을 이어간 40여년 중 26년을 최고경영자로 일하며 우리나라를 세계 최고 철강국가의 반열에 끌어올린 그는 1987년 철강업계 노벨상 격인 베세머 금상을, 1992년에는 세계적 철강상인 윌리코프상을 수상했다.

1978년 중국의 최고실력자 덩샤오핑은 일본의 기미쓰제철소를 방문한 자리에서 이나야마 요시히로 당시 신일철 회장에게 “중국에도 포항제철과 같은 제철소를 지어달라”고 했다가 “중국에는 박태준이 없지 않으냐”라는 반문을 들어야 했고, 이를 계기로 한동안 중국에서 박태준 연구 열풍이 불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실제 박 명예회장은 1992년 중국 수도강철의 명예고문으로 위촉됐으며, 지금도 중국 정부의 중국발전연구기금회 고문으로 되어 있다.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
◆난관은 없다 ‘우향우’ 정신으로

최고경영자로서 박 명예회장은 제철보국의 기업이념과 소명의식, 책임정신과 완벽주의, 철저한 투명경영, 인간존중과 기술개발의 경영이념을 실천으로 보여줬다는 평가를 받는다.

1968년 ‘포항종합제철주식회사’(현 포스코)를 창립, 초대 사장에 취임한 그는 제철소 건립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지만 출발은 순탄치 않았다. 공사 현장은 바닷바람에 모래가 날려 눈도 뜰 수 없을 정도였다. 현장을 둘러본 박정희 대통령이 ‘남의 집 다 헐어 놓고 과연 제철소가 되기는 되는 건가’라고 근심할 정도로 어려운 여건이었다. 박 사장은 현장을 진두지휘하며 임직원들에게 선조의 피와 땀으로 짓는 제철소 건설에 실패할 때는 ‘우향우’하여 동해 바다에 몸을 던지자고 목소리를 높였다. 두고두고 회자된 ‘우향우’ 정신은 이때 등장했다.

회사를 경영하면서 비효율과 부실을 막기 위해 조직의 자율과 책임문화 정립에 중점을 두었고, 이런 책임의식이 자연스럽게 완벽주의로 연결됐다. 1977년 포항 3기 설비 공사 당시 부실공사 흔적이 발견되자 80% 정도 진행된 상태였지만 “부실은 절대 허용하지 않겠다”며 즉각 폭파한 일은 완벽주의의 의지를 보여준 대표적 사례다.

13일 지병으로 별세한 박태준 포스코 명예회장(오른쪽)이 포항제철 사장 시절인 1978년 12월 포항3기 설비 종합중공식에 참석한 박정희 대통령(가운데)과 함께 제철소 내부를 시찰하고 있다.                                                                                                                                                 연합뉴스

◆최초의 일관제철소 건설까지

일관제철소 건설은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일이었다. 자본은 물론 경험이나 기술, 자원마저 없는 상태였다. 미국 등 5개국 8개사로 구성된 대한국제제철차관단(KISA)과 세계은행(IBRD), 미국국제개발처(USAID), 대한국제경제협의체(IECOK) 등 세계 곳곳에서 한국의 종합제철사업은 시기상조라는 의견이 대두되면서 건설 계획은 무위로 돌아갈 위기에 놓였다.

당시 박태준 사장이 미국을 방문해 KISA 대표와의 담판에 나섰지만 실패했다. 그러나 돌아오는 길에 하와이에서 대일청구권 자금의 일부를 제철소 건설자금으로 전용하자는 ‘하와이 구상’을 떠올리면서 새로운 국면을 열게 된다. 박정희 대통령의 재가를 얻은 그는 일본으로 날아가 축적된 인맥을 활용해 대일청구권자금 7370만달러와 일본 은행차관 5000만달러를 합한 1억2370만달러를 들여올 길을 뚫었다.

1971년 공사가 본격화하자 이번에는 장차 제철소가 완성된 후 조업에 필요한 철광석과 원료탄 문제가 대두됐다. 그는 인도, 호주 등지에서 직접 원료를 구매하기로 방침을 정하고 세계적 제철원료 주산지인 호주의 광산회사를 방문했지만 당시 우리나라의 국제 신용도는 매우 낮은 상태였다. 더구나 거대한 광산회사를 설득할 자료라고는 부지에 영어로 제선공장(Iron Making Plant), 제강공장(Steel Making Plant), 열연공장(Hot Strip Mill)이라고 큼직하게 쓴 표지판 사진이 전부였다. 하지만 그는 집요한 설득 끝에 소량 구매에도 대량 구매하는 일본과 동일조건으로 원료를 공급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이 같은 각고의 노력이 뒷받침돼 1970년 4월1일 온 국민의 성원 속에 조강연산 130만t 규모의 포항 1기 설비를 착공하고, 73년 6월9일 마침내 우리나라 최초의 용광로에서 처음 쇳물을 생산하게 된다.

최현태 기자 htchoi@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