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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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동네 산책] 난생 처음 맛본 싸구려 와인의 낭만

동장군이 문턱을 넘어선 이 즈음엔 겨울 재즈의 선율, 크리스마스의 분위기와 와인 향취에 젖는 ‘멋’을 낼 수 있다. 중학교 시절엔 80년대 팝에, 고교 시절엔 클래식에 흠뻑 빠진 나는 클래식을 더 깊이 공부하기 위해 미국으로 갔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내가 다닌 학교 바로 옆에는 버클리 음대라는 학교가 있었다. 단정하고 조용한 클래식 학교 앞의 학생들과 달리, 기타를 맨 히피 스타일, 머리를 형형색색으로 물들인 스타일, 어둡고 헐렁한 빈티지 스타일의, 제멋대로의 학생들이 학교 앞에 가득했다. 사람 구경만 해도 시간가는 줄 모르게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호기심에 들어간 버클리 음대 안에서 울려퍼지는 신기한 그 음악 소리에 취한 나는, 열심히 잘 다니던 클래식 학교를 자퇴하고 재즈 음악을 배우려고 버클리 음대에 처음부터 다시 입학하는 모험을 감행한다.

봄학기에 입학한 4월 어느 날 보스턴에 마지막 눈이 내렸다. 15명이 수강하는 작은 이론 수업에 반 이상의 학생이 수업에 결석했다. 교수님은 우리를 보더니 오늘 결석생도 많은데 학교 앞 작은 바에서 와인을 곁들인 음악 이야기를 하자고 제의하셨다. 교수의 제의에 모두 동심의 어린이들처럼 폴짝 뛰어나간 것은 물론이다.

당시 와인을 처음 마신 나는 둥근 유선형의 여성스런 잔에 담긴 보랏빛 와인이 어찌나 신기하고 예쁘게 보였던지…. 3달러 정도의 씁쓸한 맛없는 와인이었지만, 재즈의 대가이신 교수님과 세계 각국에서 모인 클래스 메이트들, 학교 앞 작고 허름한 바의 주크 박스에서 흘러나오는 재즈의 선율은 그 해의 마지막 4월의 눈과 함께 평생 잊을 수 없는 추억으로 아로새겨져 있다.

세월이 제법 흘러 지금은 훨씬 비싸고 맛난 고급 와인을 즐길 수 있지만, 난생 처음 마셔본 싸구려 와인의 첫 경험과 비교할 순 없을 것 같다. 재즈와 와인을 결합한 첫 경험은, 겨울과 하얀 눈까지 오버랩되면서 나를 더욱 행복한 멋에 취하도록 유도한다. 캐럴 송이 들려오는 지금 책 한 권 펼쳐놓은 채 눈발 흩날리는 창가를 응시하며 한 해를 보내는 사색에 젖는다.

주소은 전 우송정보대 생활음악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