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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성호의 재계3.0] 관불용침 사통거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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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 총수 형제의 회삿돈 횡령 혐의에 이어 수 백억원대 학교법인 자금 횡령사건으로 신년 벽두부터 어수선하다. 게다가 횡령한 돈 일부가 인사 청탁을 위해 정권 실세 측근에게 건네졌다는 소식에 민심이 들끓고 있다. 세상은 나날이 투명한 쪽으로 변하고 있는 데, 여전히 음지에서 개인의 영달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이들이 남아 있어 입맛이 씁쓸하다.

이럴 때면 오랫동안 공직에 있으면서 올바른 목민관의 길을 걷고자 노력했던 한 사람이 생각난다. 노동부 공무원, 대학총장을 거쳐 지금은 노사발전재단 사무총장을 맡고 있는 문형남(사진. 64) 씨다. 그의 일화를 소개하면서 목민관의 길을 반추한다.

문 총장은 늘 업무시작 30분전에 서울 마포에 있는 노사발전재단 사무실에 도착한다. 방문을 열고 들어서면 그는  바로 회의용 탁자 맞은편에 걸린 액자의 글귀, ‘관불용침 사통거마(官不容針 私通車馬)’를 세 번 되뇐다. 그날 하루 행동의 기준을 바로 세우는 것이다. 무려 30년 가까운 습관이다. 이 글귀가 적힌 액자는 항상 그의 눈에 잘 띄는 사무실 책상 앞 또는 회의용 탁자 정면에 걸려있다.

이 글은 성파라는 법명을 가진 스님이 줬다. 글을 주면서 스님은 “공적으로는 바늘 끝만큼도 자세가 흐트러지거나 일에 실수가 있어서는 아니 되지만, 사적으로는 큰 수레나 말이 지나갈 만큼 마음을 널리 써야한다”고 덧붙였다.
 
문 총장은 일찍 타계하신 4대독자 아버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래서 그는 어릴 적부터 혈연적으로 도움을 줄 사람이 전무했다. 대학도 입주 가정교사로 일해 마련한 돈으로 학비를 대면서 다녔다. 그러나 그마저도 군 제대 후에 곧바로 복학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하느님이 보우하사’ 1974년 행정고등고시에 합격하면서 ‘이제 어릴 적 내내 지긋지긋하게 괴롭혔던 가난을 떨쳐버리고 남부럽지 않게 살아 보겠구나’ 하는 희망을 갖게 됐다.

하지만 월급 봉투를 받아 든 그는 허탈했다. 강원도지사를 내리 3선 역임하고 지금은 평창올림픽조직위원장으로 있는 고시동기 친구와 같이 한 방에서 하숙을 했는데 하숙비를 치르고 나면 점심은 무슨 돈으로 먹어야 할지 걱정해야 할 정도의 박봉이었다.
 
공무원으로 시작한 사회생활, 그는 기필코 출세해야겠다는 의지를 세웠지만 현실은 그리 녹록치 않았다. 그는 당시 과연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고민을 참 많았다고 고백한다. 그러던 어느 하루 문 총장은 장모가 보살로 계시던 불보사찰 양산 통도사 서운암을 찾았다. 

통도사 주지스님을 지내고 전통 쪽빛연구와 도자기로 팔만대장경을 빚고 있던 성파스님이 서운암에 있었다. 장모 소개로 스님께 인사하게 됐는데, 성파는 문 총장을 대하자 첫눈에 “공무원을 정말 잘 선택했소”라고 말했다.

장모가 “좋은 말씀 한번 해주시지요”라고 부탁하자, “공무원으로 출세하거든 한번 찾아오시오. 내 여기 조그만 선물을 하나 주겠소”하며 ‘관불용침 사통거마’란 글귀를 줬다.
 
7·80년대 공무원 사회는 소위 ‘빽’이 없으면 승진하기 어렵던 시절이었다. 오직 공무원으로 출세하는 길밖에 없다고 다짐한 문 총장으로서는 스님이 준 글귀를 ‘빽’으로 여기며 공직생활을 했다. 무엇보다 청렴하게 업무를 완벽하게 수행하기 위해 매일매일 자신을 다잡았다.

문 총장이 사무관이던 때는 기안문을 작성하면 타자수가 타자를 쳐서 결재를 올리는 시스템이었다. 그는 인력과 물자를 아끼기 위해 이면지에 7번을 써 보고 타자수에게 맡겼다. 덕분에 상사로부터 일을 참 잘 한다는 평과 함께 안심하고 일을 맡길 수 있다는 평을 받게 됐다.

그는 많은 선배를 제치고 소위 ‘종손사무관’ 자리에 앉기도 했고 경험이 부족한 고시출신은 맡지 못한다던 일선 기관장을 30대에 맡아 주위를 놀라게 했다. 또 부처 내에서 업무성적 1위를 2년 연속 차지하면서 노동부 주요 보직을 두루 거치면서 승승장구했다.

7·80년 중반까지 문 총장 가족은 6개월 또는 1년에 한번 씩 전셋집을 옮겼다. 부동산이 하루가 멀다 하고 뛰다 보니 싼 전셋집으로 옮겨야 했기 때문이다. 이사 횟수가 많다보니 주민등록등본을 떼면 주소만 빼곡하게 2장이나 됐다. 그래서 늘 동사무소 직원이 한번 더 쳐다보곤 했다.

주위에서는 중앙부처의 힘센 과장이 체신이 말이 아니라고 숙덕거렸지만 그는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가장 든든한 빽, ‘관불용침’이 있었기에 수많은 유혹이 이겨낼 수 있었다는 고백이다.

그를 두고 주변에서는 우스갯소리로 “신발 100문은 신고 다닌다”고 말한다. 대학교 총장시절 교문도 없던 대학교를 맡아 취업률 100%라는 성과를 달성하고, 본교와 멀리 떨어진 곳에 산학협력캠퍼스를 새로 만들어 삼성전자와 MOU를 체결하는 등 교육행정에도 수완을 발휘했다. 이를 두고 그는 ‘사통거마’를 실천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노사발전재단 사무총장 직을 맡기 전, 자연인으로 있을 때에도 3개의 시민단체를 만들고 대표를 한 것도 사통거마를 실천한 결과이다. 문 총장은 오늘도 사무실 문을 열고 되뇐다. ‘관불용침 사통거마’.

문 총장은 고려대 법대를 나와 대전대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행정고시 15회 출신으로 부산지방노동청장, 노동부 기획관리실장, 한국산업안전공단 이사장, 한국기술교육대학교 제4대 총장, 최저임금위원회 제7대 위원장을 역임했다.

다산 정약용은 청렴을 여자의 순결에 비유했다. 목민심서 중 ‘율기잠(律己箴)’에서 그는 “선비(공직자)의 청렴은 여자의 순결과 같아서 한 오라기의 오점이라도 평생 흠이 된다고 했다. ‘순결한 문 총장’이 많이 나오길 기대한다.  

유성호 기자(재계 탐사보도 전문매거진 '에콘브레인' 편집장 / shy1967@gmail.com)